병조참판(兵曹參判) 윤공(尹公)이 그가 살고 있는 집에 '무호암(無號菴)'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여러 명사와 함께 그 곳에서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곤 하였다. 하루는 윤공이 말을 꺼냈다.
“여러분은 내가 이 집에 ‘무호암’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을 압니까?”
‘무호’란 그대로 해석하면 ‘이름이 없다’는 뜻인데, 윤공은 그렇게 지은 이유를 설명했다.
“옛날에는 이름[名]만 있었는데, 세월이 점점 흘러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字)를 짓고, 시(諡)를 짓고, 호(號)를 지었소. 오언시(五言詩)만 지을 수 있어도 호를 갖고, 집이 한 칸만 있어도 호를 갖고, 고인(古人)의 한 마디 말이 마음에 맞으면 호로 삼으니, 호라는 것이 천하에 가득 차서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호를 가지게 되었소. 나는 이것이 부끄러워 ‘무호(無號)’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 뜻은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데에 있소."
사람들이 이름에 집착하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그때 앉아 있는 손님 중에 자신의 호를 여유당거사(與猶堂居士)라고 하는 초계(苕溪) 정약용(丁若鏞)이 있었다.
“공(公)의 뜻은 이름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약용은 일어나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옛날에 어려서 집을 떠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성(姓)을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저 사람은 하성(何姓: 성이 무엇인가)인가?’라고 묻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결국은 하(何)가 성이 되었습니다. 하(何)도 아닌 게 아니라 성은 성이지요. 또 우둔하지만 예(禮)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의 성인식을 올리면서 축복하여 말하기를 ‘모보(某甫: ‘아무 보’라는 뜻, ‘보’는 남의 字를 물을 때 쓰는 말)’라고 하였더니, 결국은 모보(某甫)가 자(字)가 되었습니다. 모보(某甫)도 아닌 게 아니라 자는 자이지요. 지금 공이 무호(無號)로 이 집의 호(號)를 삼았으니, 그것도 호는 호이지요.”
윤공이 비록 이름을 피한다고 했지만 ‘무호’도 이름은 이름 아닌가라는 지적이다. 정약용의 말은 계속되었다.
세상 사람들을 허물하면서 결국 그들을 본받은 셈
“또 세상에서 그 집에 호를 붙이는 것은 대략적인 예(例)가 있습니다. 집에 앉아서도 남산(南山)을 볼 수 있으면 호를 유연(悠然)이라 하고, 돌[石] 빛이 문에 임해 있으면 호를 읍취(挹翠)라 하고, 강물 빛이 난간에 들어오면 호를 영파(映波)라 하고, 세속을 멀리 하고자 하는 사람은 호를 둔와(遯窩)라 하고, 말을 적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호를 눌재(訥齋)라 합니다.”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호(號)를 짓는 것이다. 진(晉) 나라 때의 은사(隱士)인 도잠(陶潛)의 〈음주(飮酒)〉라는 시에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캐고 한가하게 남산(南山)을 바라본다(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의 고사에 의해서 남산을 집에서 볼 수 있으면 ‘유연’이라 호를 지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호는, 사람이 보아서 눈에 익숙하고 들어서 귀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를 대면해서는 호를 부르지만,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은 이름을 피하지 않아도 이름이 따라붙지 않습니다.”
이름은 그럴 듯하고 익숙하지만 개성이 없다보니 잘 기억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 공은 이 몇 가지 호보다 빼어나게 ‘무호’라는 호를 지었는데, 사람들은 공의 새로운 발견에 놀라 기이하게 여겨서 집에 돌아가서도 외어서 오래도록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곧 공은 이름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이름이 더욱 따르게 될 것이니, 선생의 호는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이름을 좋아한 사실은 없고 이름을 피한다는 명분을 얻게 된 것 아닙니까? 낸들 알 수 없군요.”
결국은 좋은 이름도 얻고, 명분도 얻었다는 것이다. 윤공(尹公)은 웃으면서 사과했다.
“나는 세상이 이름을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여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요. 그런데 그대의 말처럼 내가 세상 사람들을 허물하면서 나는 정작 그들을 본받은 것이 되었는가. 그만 둡시다. 결국 나는 호를 가진 사람이 되었소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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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약용이 쓴 ‘무호암기(無號菴記)’를 각색한 것입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국역은 현대실학사에서 출간한 박석무 정해렴 편역, <다산문학선집>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원전]---------------------------------
無號菴記
今小司馬尹公名弼秉題其燕居之室曰無號菴 日與諸名士 飮且弈于其中 而告之曰公等知吾所以題吾室乎 古者名而已 世彌降而爲字焉爲諡焉爲號焉 能詩五言則號焉 有屋一間則號焉 得一拳之石而悅之則號焉 得古人一言之有契心而悅之則號焉 號者盈天下 而將屠狗販繒之皆號焉 吾斯之恥之 故題之曰無號 其志將以矯世也
座客有自號曰與猶堂居士苕溪丁鏞者 作而言曰公之志 將以逃名也乎 古者有幼而棄家者 不知其姓 人相謂之曰彼何姓也 遂以何爲姓 而未嘗非姓也 有鹵莽而好禮者 冠其子而祝之曰某甫 遂以某甫爲字 而未嘗非字也 今公以無號號其室 而未嘗非號也 且夫世之所以號其室者 大約有例焉 坐其室而可以見南山則號之曰悠然 有石色臨戶則號之曰挹翠 有江光入檻則號之曰映波 欲遠俗者號曰遯窩 欲寡言者號曰訥齋 若是者人之見之習於目 而其聞之習於耳 故臨而號之 背卽忘之 若是者雖不逃名乎而名不附焉 今公突然超是數者之上 而號之曰無號 人且愕然剏見以爲奇 而欣然歸而誦之 將終身而不忘也 卽公雖欲逃名而名益隨焉 先生之號 不其大歟 無其有好名之實 而陽爲是逃名之名也乎 鏞不敢知也
尹公辴然笑而謝之曰 吾其逃名乎 吾其好名乎 惡世之好而將以矯之也 若子之言 吾其尤而效之者邪 已而已而 吾其有號者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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