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가을 익는 소리 명료한데…

한국작가회의/한빛소리원고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1. 10. 31. 23:05

본문

728x90

 

박종국의 글밭 2011-267


가을 익는 소리 명료한데…


가을하면 으레 독서를 이야기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보다 책을 가까이하고, 글 향 물씬한 책들이 곧잘 부쳐온다. 반기며 겉장을 펼친다. 보내는 이의 바지런한 모습이 빼곡하다. 내친 김에 한달음으로 읽는다. 어떤 글을 메밥 먹듯 다소곳하게 읽고, 어떠한 글은 비벼먹듯 내 생각까지 더해서 읽어야한다. 책에 따라서는 삶아 먹고 데쳐먹고 지져먹듯 읽어야할 때도 있다.


그중 객토문학에서 보내온 제8집 <각하께서 이르기를>은 차근차근 무쳐내듯 눈매를 부라리며 읽었다. <객토>는 1990년을 전후한 그 암울한 시대에 마산과 창원지역 노동시인들이 시대의 아픔을 고뇌하는 틀 속에서 똬리를 튼 문학회다.


아내는/화장실 둘 달린 집으로 이사 가자 노래했고/나는 낡은 자동차를 바꿔 달라 노래했다//세 아이 키우면서/막내 놈이/화장실 급하다고 문고리잡고 매달릴 땐/똥 누다 말고 문 열고 나와야했고//비오는 날/도로 한가운데서 자동차가 멈춰서/비상깜빡이 넣어놓고/진땀 흘리며 견인차 올 때까지 팔을 흔들었다//아내와 내가 부른 노래의/끝은 어디일까//아내는 여전히 아내의 노래를 부르고/나는 나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정은호 ‘늪’ 모두


평소 아끼는 문형 정은호 시인의 시다. 그를 생각하면 명치끝이 아리다. 참 무던하게 사는 사람인데 그렇게 살아도 늘 다람쥐 쳇바퀴 돌듯 별반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다. 현재 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이 정 시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마따나 아직도 아내는 아내의 노래를 부르고 시인은 시인의 노래를 부르고 형국이다. 공정한 사회라고 부르짖는데 시인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가진 사람들은 마흔 평 육십 평 아파트도 쉽고, 번쩍번쩍한 중형차를 잘도 바꾸는데 시인은 나처럼 해묵은 차를 몬다. 그에게는 화장실 둘 달린 집이 꿈이다.


월말이면 말수가 줄어들고/소화마저 잘 되지 않는다//교사의 사명감이나/학습의 질을 높이는 일보다/매출을 맞추고/신입생 숫자 늘이기에/전화기가 바쁘다//아이들 가르치는 선생이지만/학생들 눈치/학부모 눈치/팀장 눈치/지점장 눈치가지 봐야하는/우리는 특수고용직/학습지 교사//교육은 미래다/백년대계라는 표어 앞에/눈을 크게 뜨고/귀를 쫑긋 세운/잘 길들여진 사냥개가 되어야 하는//나는 교사인가/세일즈맨인가// 이상호 ‘학습지 교사’ 모두


불쑥 전화로 안부를 묻는 이상호 시인이다. 그는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다 허리를 다쳐 3년 남짓 산재 환자로 재활치료를 받고, 요즘 그는 학원과 학습지 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하는 환경은 공장 노동자 때보다 더 혹독하다. 그에게서 처참한 비정규직 현실을 엿본다. 일전에 만난 그는, 힘겹지만 그나마 할 일이 있어 다행이라고 건강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역시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의 연속이다.


용역업체 파견 청소부로/하청업체 노무자로/알바로/궂은일 험한 일 가리지 않는 노동자들/한 시간 노동으로 버는 돈/유명상표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4320원//내일 또 누군가가 원청에서 하청으로/정규에서 비정규 노동자로 변해/한 시간 노동으로 벌 수 있는 돈/4320원//올해는 400만/내년에는 또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르는/미래를 강탈한 노동자/그 목줄을 잡고//억억 버는 자들이/공정하다 억지를 부르는/최저임금 4320원// 배재운 ‘공정사회’ 모두


현재 재운이 형은 이십년 넘게 다니던 공장에서 본의 아니게 희망퇴직을 하고 마산에서 식당을 내고 있다. 그래서 동인들을 만날 때나 문학 모임 때면 얼결에 신세를 진다. 형을 만나면 공장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부럽기까지 하다. 한데도 우직한 형은 가끔 속내를 드러낸다. 요즘 장사가 너무 안 된단다, 이 또한 우리사회의 질곡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거리엔 한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간판을 내리는 가게가 수두룩하다.


시퍼런 칼이 따로 없다/그 어떤 방패로도 막을 수 없는//우리공장 비정규직/달수 형 만기 형 최 씨 아재/공장을 돌며 그 동안 고마웠다고/인사를 권내는데//손을 꽉 잡아 주는 것밖에/가슴을 꼭 껴안아 주는 것밖에/할 수 있는 게 없는 내가 마냥 부끄럽다//일거리가 많아도/일거리가 적어도/정규직인 우리들보다/늘 한발 먼저 칼날 앞에 목을 내미는//비정규직에겐/오히려 노동법이 시퍼런 칼이다// 정은호 '시퍼런 칼‘ 모두


정 시인의 포효가 남의 말 아니다. 얼마 전 탄탄대로였던 고교 동기가 실직했다. 그는, 명문대학을 나와 남보다 먼저 승진했다. 별 어려움이 없을 거라 확신했는데, 비정규직에게 들이대던 칼날에 제 목이 베였다. 시퍼런 칼날이 따로 없다. 자본은 정규직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는다. 회사가 먼저이기에 무차별적으로 망나니 춤을 춘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 하여 지금 세상에는 영원한 철밥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례식장 한 구석/낯선 망자의 이름//故 허이페//공장에서 보낸 화환 한 개/고개 숙인 상추처럼 지킬 뿐/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다//빈소 문패엔/그리운 이름들//처 위용정/자 허고칭/부 허추안성/모 우쇼잉/남동생 하이펑//장지 진해화장장//아무래도 이 타국에서 저 이름들을/만장처럼 앞세워/뼈를 묻을 모양이다// 노민영 ‘허이페’ 모두


이주노동자들의 한 서린 이야기를 노민영 시인이 대변하고 있다. 줄곧 객토동인 시집 <각하께서 이르기를> 읽으며 가슴이 아팠다. 그들의 꿈이 꺾여 버린 것은 고사하고, 낯선 망자의 이름이 결코 낯설지 않은 현실이 무섭다. 우리 모두 그런 시대를 조려가며 살고 있다. 언제 이 땅의 노동형제들이 자잘한 행복을 노래하는 날이 올까. 그런 마음으로 객토문학동인 제8집을 거듭 읽었다. 가을 익는 소리 명료하다. 2011. 10. 31.


/천안지역 장애인종합정보지 <한빛소리> 제 185호, 2011년 11월호 원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