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서야, 나쁜 책은 없단다, 비벼먹듯 읽으렴
박 종 국
인서야, 오늘은 네 얼굴이 많이 어둡네. 무슨 고민거리가 생겼어?
아녜요. 답답한 일은 없는데 매일 학원 가라, 학습지 풀이하라고 다그치는 엄마 땜에 골이 났을 뿐이에요. 학교 마치고 집에 가면 제가 쓰는 시간은 거의 없어요. 오후 4시부터 밤 8시 반까지 학원공부에만 붙잡혀요. 학원 두 곳을 가야하고, 체육관에도 나가야 하고, 학습지도 꼬박꼬박 풀어야 해요. 엄만 그래야 다른 아이들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대요. 힘들지만 모두 저를 위한 일이라고 하면서….
그랬구나. 많이 힘들겠다. 너 정도면 굳이 학원 다니지 않아도 충분한데, 엄마가 너한테 바람이 커서 그래. 이해하렴. 부모의 마음이란 그런 거란다. 네 마음을 다독여주고 싶은데 어떻게 도와줄까.
저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책도 읽고, 텔레비전도 마음껏 보고 싶어요. 전 컴퓨터오락은 좋아하지 않아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책을 읽고 싶다고?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으로 봐서 어떻게 하면 네 시간이 따로 주어질까?
네, 간단해요. 학원 하나쯤 줄이면 돼요. 근데 엄마는 절대로 안 된대요. 그래서 고민이에요.
녀석, 그렇다고 포기하면 어쩌니. 엄마가 충분히 이해하도록 차분하게 말씀드려 봐아야지. 미리 안 된다고 네 생각을 접어두기보다는 한번 이야기해서 안 되면 두번, 그리고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여쭈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엄마도 네가 어떤 일을 열심히 하고자 한다면 선뜻 들어주실 거야. 더구나 다른 일도 아니고 애써 책을 읽겠다는 데 마다할 부모는 없어.
'작심삼일'이란 말 알지? 어떤 하나의 일을 두고 흐지부지한다면 차라리 아니함만 못한 거야. 네 결심이 충분하다면 엄마도 네 뜻을 저버리지는 않을 거라 확신해.
인서야. 그렇다면 책은 왜 읽어야 하는 걸까. 물론 어떤 목적을 갖고, 무엇을 깨우치기 위해서 읽어야 하겠지만, 난 그런 독서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책은 그냥 재미로, 즐겁게 읽으면 그것으로 만족해. 똑 무슨 책을 한정해서 가려 읽는 태도 좋은 독서방법은 아냐. 그냥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책을 읽는 거야. 책은 그냥 재미로, 즐겁게 읽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거야.
네, 저도 그러고 싶어요.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요. 하지만 당장에 그 책들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게 안타까워요. 그래도 엄마는 내가 책 읽는 모습보다 학원 다니는 걸 더 좋아해요.
그건 네 생각이 아닐까. 왜 엄마가 네가 책 읽는 걸 반대한다고 생각하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건 아마 평소 네가 책 읽는 게 못마땅한 데가 보였던 거야. 생각해 보렴. 그렇지 않아? 엄마도 네가 진심으로 책 읽는 데 열의를 보이면 기꺼이 찬성할 거야. 문제는 네 의지에 달렸어.
인서야, 애써 책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 특히 네 나이 때는 단 한 권의 책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 엄마도 그것은 충분히 알고 계셔. 오늘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려 보렴. 진실한 네 마음이 결국 엄마를 감동시킬 거야. 알겠지?
네, 선생님. 저녁 먹으면서 말씀드려 볼게요. 선생님이 차근차근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 주시니까 힘이 나요. 그런데 선생님, 그냥 재미로, 닥치는 대로 읽어라 하셨는데,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정말 아무 책이나 읽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다. 배고플 때 그냥 가리지 않고 온갖 잡동사니를 넣어 비빔밥을 비벼먹듯이 그렇게 읽어라. 세상에 '좋지 않은 책' '나쁜 책'이라고는 없어. 단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지.
인서야, J.A 랭포드가 <책을 기림>이란 글에서 현명한 사람은 책을 가려 읽는다고 했어. 모든 책을 '친구'라는 신성한 이름 아래 등급을 매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그들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알고, 몇 권의 책은 붕우지기로 받아들이고 가장 소중한 소유물로 아낀다고 했어. 물론 그렇다고 그 밖의 책들은 잠깐 동안의 소일거리로 하고는 제쳐놓지만, 결코 잊지는 않지. 이해가 잘 안 되지.
하지만 반고가 황금을 상자에 가득 채우기보다 자식에게 경서 한 권을 가르치는 일만 못하고, 자식에게 천금을 주는 게 그들에게 한 가지 재주를 가르치는 일만 못하다는 말뜻을 곰곰 새겨봐. 네가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될 거다. 책 속에 길이 보인다고 했어.
인서야, 모든 생명 없는 물체 가운데서,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물체 중에서, 책은 우리와 가장 가까워. 책에는 우리의 사상과 의욕과 분노의 환상과 진리에 대한 애정과 우리의 과거로 쏠리는 외고집이 담겼기 때문이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책은 인생의 급소를 완전하게는 치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과 흡사하다고 생각해.
암튼 책을 읽고 싶다는 네가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머리 아프지. 그렇지만 난 네 의견을 존중하고, 한껏 부추겨주고 싶구나. 어쨌든 엄마께 말씀 잘 드려서 네가 소망하는 책 읽기가 가능했으면 해.
네 의지를 믿고 싶구나, 인서야.
ⓒ 박종국 2016-201편
ㅣ박종국 <감성지휘자, 우리 선생님> 살림터,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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