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축구 영웅의 유니폼
축구 선수들뿐 아니라 전 유럽인의 꿈의 축제라는 유러피안 챔피온스 컵. 1962년 대회의 결승전은 5월 2일 암스테르담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거행되었다.
포르투갈의 벤피카와 전통의 명문팀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의 대결. 경기시작 전 양 팀이 운동장에 나와 몸을 푸는 사이, 다소 의아한 일이 벌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경기장 여기저기를 맴돌던 벤피카의 한 젊은 선수가 뭔가 결심한 듯 엉뚱한 방향으로 거듭해서 공을 내찼다. 공을 회수하러 가는 척하며 상대방 진영으로 건너간 청년은 은퇴를 눈앞에 둔 전설적인 공격수 디 스테파노(아르헨티나)에게 수줍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 셔츠를 주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노병의 의사를 타진했다. 그가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흔쾌히 응낙하자, 청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윽고 결승전. 3대 3으로 팽팽하게 맞서던 후반 20분, 벤피카의 9번 셔츠를 입은 청년이 비호같이 적진을 휘저으며 골을 터뜨렸다. 3분 뒤, 당년 21세의 청년은 마지막 쐐기 골까지 뽑아내며 이날의 영웅이 된다.
경기가 끝나고, 벤피카의 사상 첫 우승. 청년은 골을 기록하던 순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적진 쪽을 향하여 경기장을 가로지른다. 디 스테파노가 약속을 잊어버리면 어쩌나. 경기에 졌다고 그가 마음을 바꿔 버리면 어쩌나. 청년의 질주를 바라보던 디 스테파노는 따뜻한 말로 청년을 격려하며 약속대로 셔츠를 벗어 선물로 준다.
옷을 건네받은 청년은 변변히 인사를 차리지도 않고, 허겁지겁 탈의실까지 달려간다. 굳게 잠긴 문 저쪽에서 들려오는 감격 어린 흐느낌. 팀 동료들은 청년이 승리의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뜨거운 눈물을 떨군다고 생각했다.
청년의 회고에 따르면 그 셔츠에는 희미한 온기가 남았다고 한다. 디 스테파노의 체온이 느껴지는, 그의 땀으로 흠뻑 젖은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복. 청년은 어린 시절 영웅을 그렇게 만나고, 영웅의 체취를 그렇게 느끼고, 온몸으로 영웅과 마주했던 감격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에우제비오. 60년대 초반 유럽 무대를 평정하고 66년 월드컵에서 대 북한전 4득점을 포함, 총 아홉 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에 올랐던 바로 그 선수다.
62년 유럽 컵 결승 당시 그는 이미 세계가 알아주는 당대 최고 스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말로만 듣던 어린 시절의 우상을 눈앞에 마주 대하고, 세계 최고의 스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순수하기 그지없는 동심의 세계로, 꿈처럼 동화처럼 돌아갔다.
|박종국카카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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