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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시청과 독서

박종국에세이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7. 4. 2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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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시청과 독서

 

박 종 국

 

여느 날보다 일찍 귀가해서 거실에 똬리를 틀었다. 사는 게 버겁다지만 지난 달은 내내 시간에 쫓겨 살았다. 문학회 모임과 여러 일까지 얽히고 설 켜서 정신없었다. 게다가 세 번째 수필집을 묶으려 원고뭉치를 붙잡으니 좀이 쑤셨다. 정말이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언제나 퇴근하면 하는 일이 많다. 일상적인 집안일을 물론 한 권의 책을 읽는다. 나의 독서 이력은 삼십년 남짓 된다. 그러니 단 하루도 책을 읽지 않으면 속이 빈 듯 너무나 헛헛하다. 그제께 밤은 오랜만에 부랄 친구를 만나 넘치도록 회포를 풀었다. 덕분에 온몸이 피곤 마련하여 손가락도 까닥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설핏 누워 텔레비전을 보았다. 리포터들이 전국의 각 지역을 돌며 삶의 현장을 전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냥 스쳐 지나는 화면만 응시했다. 색다른 감흥을 주기보다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참 이상했다. 아무 하는 일도 없이 그렇게 두어 시간을 텔레비전 앞에 붙잡혔다. 텔레비전을 보겠다고 작정하지도 않았는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무려 세 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 시간 미뤄뒀던 원고정리며, 강의안 작성에 시간을 쪼개어 써도 빠듯한데 세 시간이 덧없는 흘러갔다. 음악을 들으면 다른 일을 병행한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거나 혼자만의 사유체계를 갖출 수 없다. 텔레비전은 그저 맹한 상태로 지켜만 보아야한다.

그렇다고 텔레비전 시청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며 시청하는 게 좋지 않다. 물론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의 의도에 쉽게 장단을 맞추는 사람은 생각이 다르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텔레비전 시청은 무용론에 가깝다. 우선, 텔레비전 시청은 수동적인 행위다. 이 점에 반론이 만만찮다. 텔레비전을 보는 행위는 아무런 의지 없이 애완동물부터 말 못하는 세 살짜리 꼬마까지 누구라도 본다.

 

그러나 음악을 듣거나 글을 쓰고, 책을 읽는 행위는 이와 다르다. 그것들은 모두 능동적인 행위가 따라야만 가능하다. 노래 한 곡을 듣고, 글 한 편을 완성하고, 책 한 권을 읽는 데는 그만큼 행위 자체에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사실 세 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봤지만 머리 속에 제대로 남은 정보는 없다. 실상 어떠한 정보를 얻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쪼개가며 텔레비전을 보았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멍한 상태의 지속으로 정작 하고자 했던 일을 미뤄두고 시간만 소비했다는 자괴감이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이와 달리 그 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면 상황증거는 많이 달랐을 거다.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지로 얻어지는 정보가 그만큼 깊은 인상이 남았을 게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집에 가면 커다란 책장이 눈에 띠고, 가난한 사람의 집에 가면 커다란 텔레비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의미심장한 얘기다. 어느 집을 방문할 때면 먼저 그 집안의 서재에 눈이 간다. 책이 많다는 사실은 그만큼 정신적인 자기의지가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친구한테 휴일 산에 하자고 권했다. 근데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애써 고생해서 올라갔다가 내려올 산을 무엇 하러 올라가느냐고. 옳은 말씀이다. 왜냐? 그는 날마다 퇴근하면 텔레비전을 보는 게 유일한 취미다. 특히 휴일에 거실 소파에 턱하니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게 즐겁다고 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취미가 다름을 인정해야한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야한다. 멍한 상태로 텔레비전을 보는 행위는 분명 자기의지력이 약한 소치이고, 수동적이며, 무분별한 시간땜질이다. 굳이 텔레비전을 보아야한다면 아무 프로그램이나 시청할 게 아니라 유익한 프로그램을 선별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면 보다 값진 정보를 얻고 자기 의지력도 키운다. 더 이상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라는 변죽을 맞지 않으려면 독서와 상극으로 치닫지 않았으면 좋겠다. 2011. 06. 17.

<월간에세이> 201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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