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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학교에서 시험이 사라질까

박종국에세이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7. 7. 1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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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학교에서 시험이 사라질까

 

박 종 국

 

오늘 아이들 기말 시험을 쳤다. 예년과 달리 객관식선다형 시험을 지양하고, 주관식서술시험을 바뀌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어디까지나 시험이 시험이다. 한 달 전부터 온통 시험에 주눅이 들어 파김치가 되도록 학원과외에 매달리고, 교실에서도 틈만 나면 문제집 풀이에 열심이었다. 공부를 야무지게 한다는 아이가 더 심했다. 그만큼 부모의 바람이 큰 탓이다. 개중에는 국어 수업시간인데도 수학문제집을 푼다거나, 수학시간에 사회문제를 풀고 앉은 아이도 보인다. 꼬집어 충고해주고 싶지만 오죽하면 그럴까 싶어 눈감아 줄 때가 많다.

 

시험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없다. 그럼에도 아직 학교는 평가라는 장치로 시험을 계속한다. 초등학교의 경우 판에 박은 시험은 필요치 않다. 각 단원학습의 결과보다는 과정에 충실함이 우선되어야 한다. 지난 30여 년 동안 아이들의 6학년 담임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그들의 성장을 지켜봤다. 그 결과는 너무나 빤했다. 단지 점수를 잘 받았던 아이보다 잘 놀고, 적극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가 참다운 삶의 정점에 섰다.

 

소위 4대문 대학을 가야하고, 판검사, 변호사, 의사가 되어야 성공한 삶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 사는 세상은,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봉사하는 헌신성을 제일로 사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조금 머리가 좋았다는 아이들, 그 말로는 빤했다. 남들보다 더 나은 직장, 더 많은 월급을 받고, 더 좋은 차를 탔다. 그뿐이랴. 예쁜 아내와 넓은 집에서 나보란 듯이 산다. 그렇지만 그게 우리 삶의 바로메타는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민들은 새로운 기대에 부푼다. 정녕 이번 만큼은 사람 사는 세상이 되겠지. 하지만 숫제 김칫국물부터 커는 일이 되고 만다. 새 정부가 일꾼이라고 천거한 사람들, 인사청문회만 거치면 시정잡배들에 버금가는 비리와 부정으로 온통 사납니다. 물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겠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부실공화국에 산다는 자괴감마저 든다.

 

이는 학교교육의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난 결과다. 단지 점수만을 최고로 매김 하는 우리의 대학입시제도가 그 비리의 단초다. 머리만 채웠지 가슴을 뜨겁게 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급한 업적주의만 인정받고, 처연하게 행동하는 인간정리는 도외시한 결과다. 사회 모든 위치를 점유하는 이들이 시험이란 굴레로 사다리를 오르니 이 땅에서 학력제일주의 망령이 사라지기는 요원하다. 게다가 학연과 엘리트주의도 한 통속인 나라다.

 

온갖 비리를 저지른 장본인들이 뻔뻔하게 낯짝을 드러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나라다. 점수만을 최고로 여기는 나라에서 갓 스물에 대감이 된 어느 인간은, 온갖 어쭙잖은 일을 다 저지르고도 아직도 재 잘못을 모르고 목 고개 빡빡하게 들고 다닌다. 안하무인격이 따로 없다. 점수위주의 교육이 만들어낸 참 어처구니없는 아바타다.

 

아이들 시험지를 코를 박고 열심히 푼다. 간간히 모르는 문젠지 머리를 쥐어짠다. 그 모습을 지켜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왜 한참 뛰어놀아도 모자랄 아이들이 시험에 발목 잡혀 이다지도 괴로워해야 하는가. 9차 교육과정까지 그 변화와 혁신을 함께하면서 매번 가슴이 아팠다. 왜 우리는 저 핀란드와 스웨덴, 네덜란드 같은 교육혁명의 일으키지 못할까? 뉴질랜드도 맞춤하고 싶은 교육선진국이다.

 

교육의 질은 결코 교사의 수준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건 진리다. 그럼에도 우리 교육은 아래로부터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판에 짜인 억지 춘향 놀음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니 그 파급효과가 학교현장에 접목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당장에 시험 하나 없앤다고 교육혁명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젠 구태의연한 틀을 벗어야 할 때다. 새 정부에 변혁된 교육혁신을 기대해 본다.


5교시 시험을 끝낸 아이들 어찌 좋아하는지 홀연 날아갈까 걱정된다. 언제쯤 학교에서 시험이 사라질까?

   

박종국에세이칼럼 2017-39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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