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말 한 마디 때문에
박 종 국
“인영엄마는 좋겠다. 신랑이 그렇게 잘 해주니까”
“그래? 그럼 살아봐”
“야, 요강에 앉아서 똥 싸는 얘기 그만해”
“요강에 똥 싼다고? 살아봐”
저녁상을 물리고 신문을 훑어보는데, 아내가 여고동창과 통화했다. 거의 날마다 설거지를 끝내면 전화기가 뜨뜻해지도록 하는 요량이라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글쎄, ‘그래, 살아봐’하는 말꼬투리에 신경이 곧추셨다. 대화내용으로 보아 이야기 당사자는 바로 나였다. 벌써 2년째 집지킴이로 숨죽여 사는 처지라 그냥 건성으로 듣고 넘겼다. 그러나 ‘그래, 살아봐’ 말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봐서 여러 가지로 나한테 불만이 많다는 말투였다.
작년에 회사권고로 명퇴한 친구 얘기다. 그렇잖아도 오십 중반 원치 않는 실업자로 전락한 채 두문불출하는 자신이 미욱스러운데, 아내는 일마다 불만이다. 요즘에는 그 빈도가 부쩍 심하다고 한다. 낮 동안 혼자 지내는 외로움을 달래고자 키우는 고양이한테도 시선이 곱지 않다. 걸핏하면 내다버리라는 지청구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 같아서는 누구한테 권내주고 싶지만, 고양이가 무슨 잘못이라 닦달을 받으면서도 더욱 애착을 갖는다고 했다.
살면서 무턱대고 내뱉는 소리가 ‘사는 게 재미가 없다’, ‘힘들다’, ‘못 살겠다’는 하소연이다. 우리 사회 상위 1%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나락이다. 그런 칼끝에 섰다면 자연 삶이 심드렁해지고, 살맛이 안 난다. 그렇지만 대놓고 못 살겠다고 투정하는 걸 보면 가장으로서 체면이 구겨진다. 숫제 밥벌이에 부실한 가장은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다. 하소연하는 친구나 별반 처지가 다르지 않다. 나도 심심찮게 듣는 얘기다.
어디 싸우지 않는 부부를 만나랴. 서로 살갑게 사는 부부일수록 들여다보면 징그럽게 다툰다. 조그만 일 하나에도 딴죽을 걸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잉꼬부부라 소문난 부부가 더 속내를 감추고 산다. 살면서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하지만, 되레 앙숙으로 곁가지가 불거지는 일이 많다. 어느 날부턴가 공손하고 공대하던 말투가 반말 짓거리로 변하더니 한순간 숫제 ‘야자타임’이 되어 버린다. 이럴 땐 아내 측에서 변명을 댄다. 갱년기가 되고 보니 호르몬 변화 때문에 나도 모르게 거칠게 된다고. 그래서 사소한 말 한 마디를 아무렇게나 내뱉는다.
행복하게 산다고 자신하던 어느 젊은 부부. 어느 날 퇴근길에 버스 정류장을 지나다가 같은 사무실 여직원을 보고 차를 세웠다. 퇴근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 틈에서 기다리는 동료를 보고 방향이 같기에 불러서 태워주었다. 그때 남편이 한 젊은 여성을 승용차에 태우는 모습을 본 아내의 친구가 급히 전화를 했다. 친구의 전화를 받은 아내는 남편을 맞이하는 태도가 사뭇 냉담했고, 그날 저녁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과 다퉜다. 그날 밤, 부부는 끝내 서로를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지도 않았다.
그렇게도 긴 밤을 처음 경험했다. 날이 밝았다. 그러나 아내는 일어나지도 않았고, 남편은 아침식사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집을 나갔다. 아내는 늘 하던 배웅도 하지 않았고, 둘은 처음으로 무척 외롭고 슬펐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는 남편의 미안해라는 목소리를 기대하고 급히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전화는 남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막힌 소식이었다.
고약하게도 사소한 말 한마디가 한 부부를 불행의 늪으로 빠뜨렸다. 부부는 항상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신실한 사랑으로 영유해야 했음에도 아내 불신의 폭이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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