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젊음
방학 중이지만 출근하는 날이다. 딱히 근무요건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느긋하게 집을 나섰다. 차가 밀렸다. 어디쯤 교통사고가 났나, 한참을 기다려도 꽉힌 길은 풀리지 않았다. 해서 차를 길가장자리 멀찍이 세워두고 편의점에 들렀다. 미처 생수를 챙겨오지 않았던 터라.
혈압을 이기려면 짠음식 조절이 우선이다. 그리고 운동하고, 틈틈이 물 마시라고 했다. 하루 2리터 패트병 하나면 족하다. 그러면 혈액순환은 물론, 이뇨작용에도 좋다. 때문에 항상 물병을 챙겨든다. 근데 바삐 나오더라 물병을 놓고 나왔다. 이럴 때일수록 쉬 갈증을 느낀다.
막 편의점에 들어서는데 애띤 아가씨가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그냥 건성으로 응대하고 곧장 판매대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 한 병을 꺼내들고 계산대에 올렸다. 그런데 점원은 계산을 하지 않은 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선생님, 저 모르겠어요? 민지예요. 서민지."
"민지라고? 부곡초 서, 민, 지?"
"네, 선생님,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네요?"
"정말 아가씨가 민지란 말이죠?"
"그래요. 선생님! 서민지예요. 민지!"
"아, 이제 보니 낯익은 얼굴이네. 지금 대학에 다닐 나이일텐데, 방학했나?"
"네, 대학 다닐 나이예요. 그런데 저는 대학 가지 않았어요."
"그래? 좋아 보인다."
"네, 6학년 때 말썽 피워 귀에 딱지가 않도록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는데, 아직도 이렇게 허둥대요."
"힘들지?세상살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래도 재밌어요. 선생님!"
서민지. 그는 2천년 초입에 내가 6학년 담임했던 반 아이였다. 언제나 해밝고, 총명해서 공부도 썩 잘 했다. 또래들과 사이도 원만하고, 집안형편도 부유했다. 말썽은 곧잘 피워도 나는 그에게 향후 크게 성장하리라 예견했다. 민지 부모의 양육도 충분했다. 그런 민지를 편의점 알바생으로 만났다. 고작 시급 1.060원 오른 일자리가 하찮다는 게 아니다. 적어도 민지의 가정환경을 수렴해봤을 때 의외라는 예기다.
'민지는 알바를 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전혀 구김이 없는 그 모습이 너무 미더웠다. 젊음의 에너지는 그렇게 건강해야 한다. 어찌 직업에 귀천을 따지랴? 그러나 지금 이 땅의 젊은이들은 어렵고, 힘 들고, 거친 일을 마다 한다. 하물며 시급 7천원 알바에 목을 매는 젊은이는 그리 많지 않다. 쉽게 돈 버는 일자리 유혹 때문이다. 한데도 민지는 자잘하게 궂은일도 꺼리지 않는다고 했다.
"선생님, 놀라셨죠?제가 알바하는 모습을 보시고 말에요. 그렇지만 전 괜찮아요. 오히려 거침없이 일을 하는 제가 자랑스러요. 저희 아빠 아직도 예전의 공장을 운영해요. 부모님도 건강하세요?별 문제없이 잘 살아요."
"그렇구나. 다행이다. 난 설핏 걱정했단다."
"그럴거여요. 친구들도 제 모습을 보고 그렇게 말하곤 해요. 전 어떤 일이든 당당하게 헤쳐나가요. 선생님, 걱정마세요."
"민지야, 언제나 네가 자랑스럽다."
예나지금이나 민지는 당당하다. 스물셋, 부모의 조력을 충분히 받아야 함에도 그것을 마다한 채 현실과 맞딱뜨렸다. 내심 그의 건강한 젊음이 부러웠다. 강철왕 카네기는 아들은 고사하고 손주들에게도 용돈을 거저 주지 않았다고 한다. 적어도 정원 잔디를 깎거나 구두 손질을 할 때 그 대가를 지불했다. 민지는 그와 판이하게 다르다. 부모가 충분히 조력해준다고 해도 마다한 젊은 용기의 소유자이다.
"선생님,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고 했잖아요. 저도 그러고 싶어요. 남들은 배부른 짓을 한다고 비아냥대요. 그렇지만 저는 그런 인센티브를 다 떨쳐버리고, 제 힘으로 시작하고 싶어요. 선생님도 그러셨잖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친구가 말했다, 아들딸 품에 끼고 살지 말고 거친 세상에 내놓아라고. 아무튼 편의점 케셔로 궂김없이 살아가는 민지의 젊은 혈기가 부러웠다. 녀석, 분명 너는 커다란 사고를 칠 거다. 난 널 믿어. 그래, 민지야, 젊음이 무한한 재산이다.
출근길 아침하늘이 참 말갰다.
_박종국또바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