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행복한 일
박 종 국
누구나 어렸을 때 '나도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 눈에 비친 어른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한다. 그렇지만, 아이는 그렇지 못하다. 경제적인 힘이 없을 뿐더러 어른의 간섭이 만만찮다.
그러나 막상 어른이 되면 어렸을 때가 좋았다고들 말한다. 대개 어른들은 현실적으로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아이는 무한한 꿈을 가졌다. 어린 시절 어른이 되면 아이한테 무조건 잘 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그게 얼마나 막연한 꿈이었던지 후회하게 된다.
특히, 어린 시절 행복한 기억이 많을수록 그에 해바라기를 한다. 하지만 유년시절 아린 상처가 또렷하다면 지금 어른으로 만족한다. 어렸을 때 치유되지 않는 핵심감정은 결코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상처로 남는다.
지난 30년 동안 6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숱한 아이를 만났다. 그 중 유독 한 아이, 그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외할머니와 살았다. 아니, 돌배기 때 당한 일이라 부모부재에 대한 아픈 기억은 깡그리 없었다. 그럼에도 외할머니와 이모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여느 아이보다 해밝게 자랐다.
그런 그가 우연한 기회에 부모님의 비애를 듣고는 크게 흔들렸다. 6학년 막 사춘기 문턱을 밟았을 때였다. 그때 나 역시 총각선생이었으니 우리는 동변상련 하듯 죽이 맞았다. 그런데 녀석이 며칠 쏘다니다가 퀭한 얼굴로 교실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짜고짜 배고프다는 얘기만 연발했다.
그때 그 시절은 전기나 가스로 음식을 장만할 때가 아니었다. 석유곤로에다 새까맣게 그을린 냄비 하나였다. 반찬도 김치 한 보시기, 장아찌 한 접시면 밥 한 공기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딱 비웠다. 근데 나는 밥보다 라면을 더 자주 끓였다.
나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음에도 넌지시 세 봉지를 끓였다. 녀석이 눈치코치를 보지 않고 폭풍흡입하게 하려면 곁에서 같이 먹는 시늉을 떨어야 했다. 그렇게 녀석의 연사흘 주린 배를 채우고 나면 첫 시간 교과서를 펼쳐들기도 전에 책상 엎어져 잤다. 아예 널브러져 잤다.
그렇게 녀석과 한 해 동안 별 부딪침 없이 지냈다. 그리고 나는 학교 만기가 되어 울산으로 새 부임지를 찾아 떠났다. 그게 녀석과 20년 세월을 후딱 지나치게 한 사연이었다. 그 사이 우리는 단 한 번도 연락하거나 만난 적도 없었다. 풍문으로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남해를 거쳐 창원에 입성했을 때 우연찮게 선술집에서 성인이 된 그를 만났다. 우린 누가 먼저라기보다 단박에 서로를 알아봤다. 그는 마흔 초반, 나는 오십대 중반의 동네 아저씨였다. 뭐랄까,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들이 남다른 음색으로 서로를 감지하듯 우리는 서툰 젓가락질로 알아차렸다. 우린 지독한 왼손잡이였다.
그날 우리는 옛이야기를 안주삼아 까만 밤 하얗게 지새웠다. 그의 어엿한 성장이 너무 고마웠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고 또 해도 우리는 자리를 파할 수 없었다. 마치 양파껍질 벗기듯이 자잘한 이야기는 시도 때도 없이 발개졌다. 용케도 그는 사춘기적 고뇌를 말끔히 잊고 심신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다(이후 그 숱한 얘기들은 애써 똬리를 틀어둔다)
지금까지 선생으로 살면서 보람찬 일이라면 그것은 바로 제자들의 올바른 성장을 지켜봤을 때다. 마땅히 그 성장이라면 어른으로서 제 역할을 다한다. 확신하건대 6학년 담임을 만나 선술집에서 막소주 한 잔을 건네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제자라면 그는 나의 성공작품이다.
꼭두새벽 서산에 걸린 초승달을 보며 그가 말했다.
“선생님, 그때 그 바다 기억하나요? 지독히 추웠던 그날, 절벽에서 뛰어내린 저를 선생님이 달려들어 건져주셨지요? 전 차가운 겨울바닷바람에 발발 떨었어요. 그렇지만, 전요, 하나도 안 추웠어요. 지금처럼 선생님이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었으니까요. 전 항상 먼발치에서 선생님 소식을 듣고 살았어요. 그러면서 결심 하나했어요. 적어도 박종국 선생님께는 못난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그래서 이빨 앙다물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지금 그는 불혹이다. 여태껏 부모의 사랑에 목말랐던 그가, 세 아이 아빠로, 여우같은 아내랑 정답게 산다. 그의 전화를 받으면 언제나 목젖이 아리다. 요새 그는 입만 뻥긋하면 좋은 아빠로 살고 싶단다. 참 행복한 일이라며.
-박종국또바기글
엄마는 같은 여자인데 왜 남자편일까? (0) | 2018.04.07 |
---|---|
참 좋은 이야기 (0) | 2018.04.06 |
나의 습작기 회상 (0) | 2018.04.06 |
아름답게 늙기 (0) | 2018.04.06 |
품안의 자식 품 밖의 자식 (0) | 2018.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