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호주 최고의 공돌이
“저는 남보다 빨리, 그리고 많은 돈을 가지고 이곳에 왔죠. 빨리 성공해서 금의환향하려고 했지만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더군요.”
환갑이 가까운 그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60년대 말,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경제발전의 물결을 타고 많은 돈을 벌고, 미모의 스튜어디스와 사랑에 빠져 결혼도 했다. 학벌, 결혼, 돈에 모두 성공했다.
김해 산골이 고향인 그는 혼자서 서울에 올라와 화공약품상에서 일하면서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화공약품상에서 그는 커다란 통속에 담긴 암모니아를 호스에 입을 대고 빨아 여러 작은 병들에 옮겨 담는 일을 했다. 그런데, 한 모금만 입 속으로 들어가도 혀가 타버리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언제나 먼 저쪽이었다. 80년대 초, 그는 벌어놓은 거액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당시엔 미지의 세계였던 호주로 떠났다.
“처음 여기에 와보니까 호주인들이 전부 느려빠졌더라구요. 게다가 아내나 저나 영어를 잘하고 자본도 충분하니까 자신을 가졌죠.”
그는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그에겐 자신감이 지나쳐 못된 버릇을 가졌다. 자신보다 못해 보이면 무시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못났다고 판단되면 얘기조차 하기 싫어했다. 그는 그렇게 주변사람들을 대했다.
그런데 그가 투자한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해 버리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아내와 한 살짜리 아이와 함께 길거리에 나앉을 만큼 큰 위기였다. 앞날에 대한 계산이 틀려본 적이 거의 없던 그는 절망에 빠졌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술집에 앉았다. 그때 낯선 사람이 다가왔다.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맛이 어때?”
자세히 살펴보니 전에 그가 무시했던 교민 중 한사람이었다. 교만에 대한 대가였을까. 그 교민은 통쾌한 듯 그를 비웃으며 들었던 잔의 술을 그에게 끼얹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그는 베어링 공장에 늙은 공원으로 취직해야 했다. 공장의 환경은 열악했다. 그나마 약간의 기술이라도 가졌으면 편한 작업대를 차지했지만, 변변한 기술이 없었던 그는 무거운 자재를 날랐다.
한 번은 자재에 깔려 허리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맛보기도 했다. 감독관이 때리려고도 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저항했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점점 자신이 비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차라리 공돌이가 되자. 하지만 이왕 공돌이가 되려면 호주 최고의 공돌이가 돼야지.'
다음날부터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얼마 안 가서 그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몇 달 뒤엔 공장의 신임을 받아 서기로 임명되었다.
한 해가 흘렀다. 어느덧 그는 백인 수십 명을 부리는 매니저가 되었다. 용기를 얻은 그는 공장을 나와 옷에 수를 놓는 봉제업을 시작했다. 이제 뭔가 될 듯한데 역시 중요한 건 돈이었다.
그는 돈을 빌리러 은행을 찾아갔다. 그렇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새로운 세계에서 그는 역시 못 믿을 이방인이었다. 그는 은행 지점장에게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5년 뒤에는 반드시 당신이 나에게 와서 '돈을 빌려 가십시오' 할겁니다.”
5년이 흐른 어느 날 그의 말대로 호주인 지점장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5년 전 한 말을 가슴에 담아 왔습니다. 이제 저희 은행돈을 써주십시오.”
지점장이 찾아와 점심을 사면서 그가 철저한 신용조사에 통과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의 사업이 더욱 탄탄해졌다. 그러나 이제는 돈이 전부가 아님을 그는 깨달았다.
“저는 여기 와서 완전히 깨지고서야 '인간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았어요. 개미같이 일만 하는 게 인간적인 말고는 멀어요. 이 아름다운 자연에, 문화가 풍부한 나라에 잘살겠다고 와서 뒷골목에서 개미같이 일만 해서야 되겠어요?
시드니 하면 연상되는 멋진 오페라 하우스 아시죠? 돈 없을 땐 가족과 함께 그 앞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잠시 바다를 구경했어요.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노는 그게 삶이에요.”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는 더 이상 돈의 노예가 아니었다. 그의 얘기는 계속됐다.
2년 전이었다. 시드니 교외에 엄청난 불이 나자 구호기관에서는 주민들에게 의연금을 요청했다. 백인들 사회라도 개인이 내는 돈은 오십 불, 백 불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선뜻 3천불을 시청에 내놓았다. 그 사회에 뿌리박기 위해서는 어려움에도 동참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몇 달 뒤, 난데없이 소방국에서 연락이 왔다. 전 호주 소방관들의 제복 위의 표장을 그가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의연금보다 몇 배의 이윤이 돌아온 셈이다. 그는 깨달았다. 사랑하면 사랑이 오고 교만하면 냉대 받는다는 사실을.
이민 온 지 20년이 흐른 지금 그는 이제 교민사회의 반석같은 지도자가 되었다.
“한국에 국회의원을 하는 몇몇 동창들이 살아요. 어쩌다 만나면 답답해요. 다음에 누가 어느 자리에 가고 누구는 옷을 벗고…. 늘 이런 얘기들이죠. 세상이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데, 환갑이 가까워도 그런 소리들만 하는지….”
그는 정작 소중한 게 무언지 아는 사람이었다.
<은빛 남자의 금빛 이야기>등의 책을 쓴 엄상익 변호사. 그는 법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사람의 아름다움과 세상을 사는 바른 이치를 글로 남겼다.
필자 : 엄상익님 변호사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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