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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의 선택

세상사는얘기/좋은글퍼온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21. 9. 2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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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의 선택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서른셋의 나이에 이미 백만장자가 되었다. 43세에는 세계최대의 석유회사 스탠더드오일을 세웠다. 그렇다면 53세의 록펠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53세의 록펠러는 뜻밖에도 수많은 근심에 싸여 괴로워했다. 지나친 근심 걱정과 극도로 긴장된 생활은 조금씩 그의 건강을 잠식해 갔다.

록펠러의 자서전을 쓴 위클러는 당시의 록펠러는 마치 ‘산송장’ 과 같았다고 말했다. 록펠러는 53세 때 특이한 소화불량성 질병을 앓았다. 이 때문에 머리카락은 물론, 눈썹과 속눈썹까지 다 빠져버렸다. 의사의 설명에 따르면, 록펠러의 병은 일종의 신경성 탈모증이었다.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빠져서 한동안 두건을 써야 했고, 나중에는 500달러를 들려 은색 가발을 만들었는데 죽을 때까지 이것을 착용했다.

록펠러는 원래 건강했다. 농장에서 자란 록펠러는 어깨가 떡 벌어지고, 매우 건강했을 뿐더러 걸음걸이도 힘차고 당당했다. 그러나 53세가 된 록펠러의 얼굴은 할아버지나 다름없었다. 록펠러는 세계최고의 갑부였지만, 그가 먹는 음식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다를 바 없었다. 록펠러가 일주일 동안 벌어들이는 돈은 100만 달러 이상이었지만, 그의 일주일 식비는 2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의사가 그에게 칼로리가 아주 적은 비스킷 두세 쪽만 먹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의 피부는 마치 주름지로 포장한 듯 윤기를 잃어 버석거렸다.

왜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을까? 고혈압과 늘 극도로 긴장된 생활에서 비롯된 스트레스가 주요원인이었다. 이것은 명백한 자업자득이었고, 그는 자칫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했다.

23살의 록펠러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무섭게 돌진했다. 록펠러를 아는 사람은 모두 “그는 돈 버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면 전혀 웃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돈벌이가 되는 정보를 얻으면 흥분하여 모자를 집어던지고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그리고 만약 조금이라도 손해보는 날이면 병이 났다. 한 번은 그가 4만 달러 분량의 곡물을 사들였는데, 선박으로 오대호를 거쳐 운반할 예정이었으나, 어떤 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보험금150달러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날 밤 오대호에 거센 광풍이 몰아쳤다.

이 순간 록펠러는 매우 당황하며 배에 실린 곡물이 광풍에 날려 호수에 잠기거나 해서 큰 손실을 보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다음날 아침 그의 사업 파트너인 조지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초조하게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하는 록펠러를 발견했다.
“어서 오게! 어서와!”
록펠러는 너무 긴장하여 제대로 말도 잊지 못했다 .
“지금이라도 보험에 가입할 방법이 없을까? 지금 당장 보험회사에 가서 보험을 들어야겠네.”
그래서 조지는 곧바로 보험회사로 달려가 보험에 가입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조지는 조금 전보다 더 초췌한 록펠러를 발견했다. 조지가 보험회사에 간 사이 곡물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전화를 받았고, 곧 보험금150달러를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록펠러는 자신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 너무 쉽게 돈벌이를 했다며 계속 투덜거렸다. 그의 신경을 극도로 예민해졌고, 결국 홧병이 나 앓아눕기까지 했다.

상상이 되는가? 당시 록펠러의 회사가 일 년 동안 벌어들이는 돈은 50만 달러가 훨씬 넘었는데, 겨우 150달러 때문에 앓아누웠다.
록펠러는 백만장자이면서도 하루 종일 돈이 없어질까, 손해를 입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온퉁 돈만 신경을 쏟았다. 이러했으니 록펠러가 건강을 잃은 이유는 당연했다. 록펠러는 운동도 하지 않았고, 카드놀이도 하지 않았으며, 어떤 파티에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한편, 록펠러는 펜실베이니아 주 유전 지역 주민에게 큰 원한을 사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동상을 무너뜨려 교수형에 처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또, 가짜 록펠러의 목을 노끈에 묶어 매달아놓고 채찍질을 해댔다. 록펠러의 사무실에는 그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내용의 협박성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록펠러는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증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걸로 내 사업이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저주를 하든 증오를 하든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람이었기에 언제까지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얼마 후 록펠러는 자신의 내면에 자신이 싸워야 할 새로운 적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신세의 이상을 느꼈을 때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쉽게 떨쳐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불면증, 소화불량, 탈모증까지 이어지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자신의 신체에 나타나기 시작한 불길한 징후를 외면할 수 없어 의사를 찾아간 록펠러는 최후의 통첩을 받았다.

록펠러는 돈, 사업, 생명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했다. 의사는 록펠러에게 즉시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퇴직하지 않으면 이대로 생명의 나무가 말라가는 걸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록펠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규칙을 정해주고 반드시 엄수하도록 했다.

1. 모든 걱정과 고민을 털어버려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절대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마라.
2. 여유를 가져라. 긴장된 신체를 풀어주는 실외 운동을 즐겨라.
3. 식사는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마큼 먹어라. 더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식탁에서 일러서라.

록펠러는 이 세 가지 규칙을 철저히 지켰고, 퇴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을 되찾았다. 그는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고, 화초를 키우고,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하고, 카드놀이도 즐기는 등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위클러는 “록펠러는 수많은 근심 걱정으로 불면증에 시달린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기회를 얻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는 주변 사람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하는 생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이 가진 돈으로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까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록펠러는 자신의 재산을 세상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그가 한 교회에 거액을 기부하자 뜻밖에도 미국의 모든 교회에서 ‘부정한 돈’ 은 받을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기부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느 날 미시간 호 근처 한 작은 대학교가 재정난으로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록펠러는 이 학교에 수백만 달러를 아낌없이 기부했다. 이것이 오늘날 명문대로 자리잡은 시카고대학교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그는 미국 내 흑인을 지원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모든 흑인대학에 금전적인 지원을 했다. 그의 기부활동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은 십이지장충박멸운동을 지원한 일이다.

당시 십이지장충병 전무가인 찰스 윈슬로는 “남부 여러 주의 최대 재난은 십이지장충병입니다. 환자 한 명당 50센트의 약값만으로 치료하지만, 지금 어느 누가 이렇게 많은 돈을 내놓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촬스의 발언은 곧 록펠러의 관심을 이끌어냈고, 그는 남부 여러 주에서 십이지장충병을 박멸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의 기금을 내놓았다. 더 나아가 그는 ‘록펠러 재단’을 설립하고 전세계에서 각종 질병을 퇴치는 데 앞장섰다.

이후 록펠러재단은 전 세계를 종횡무진했다. 세계 어디선가에서 어떤 이상주의자가 갖가지 운동을 벌이다가 금전상의 문제로 곤경에 처하면 록펠러 재단은 언제나 이 인도주의적 개척자를 지원했다.

인류발전에 기여하는 연구를 진행하는 과학자나 대학을 세우려는 교육자, 질병퇴치에 힘쓰는 의사가 진행하는 공익사업이 바로 그것이었다. 록펠러의 금전적인 도움으로 인류는 페니실린을 발견하는 등 수많은 기적을 이루어냈다. 페니실린이 없었던 시절에는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들 5명 중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은 이 병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이 없어졌으니 전 세계의 부모는 모두 록펠러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그 밖에도 말라리아, 폐결핵, 유행성감기, 디프테리아 등의 질명 치료법도 록펠러의 공헌을 받아 개발되었다.

그렇다면 록펠러 자신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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