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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은 없단다, 비벼먹듯 읽으렴

박종국에세이/독서칼럼모음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23. 4. 1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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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은 없단다, 비벼먹듯 읽으렴"
가려읽기보다 즐겁게 읽는 게 더 중요해


박 종 국


인서야, 오늘은 네 얼굴이 많이 흐리네. 무슨 고민거리 생겼어?
 
아녜요. 고민은 없는데 매일 학원 가라, 학습지 풀이하라고 다그치는 엄마 땜에 화가 나요. 학교 마치고 집에 가면 제 스스로 쓰는 시간이 별로 없어요. 오후 4시부터 밤 8시 반까지 공부만 해요. 학원 가고, 체육관 가야 하고, 학습지를 풀어요. 엄만 그래야 다른 아이한테 뒤떨어지지 않는대요. 모두 저를 위한 일이라고 하셔요.

그랬구나. 많이 힘들겠다. 너 정도면 굳이 학원 다니지 않아도 충분한데, 엄마가 너한테 바람이 커서 그래. 이해하렴. 부모의 마음이란 그런 거란다. 네 맘을 풀어주고 싶은데 어떻게 도와줄까?

괜찮아요. 선생님, 저는 한쪽으로만 얽매인 시간보다 제 스스로 사용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책도 좀 읽고요.

책을 읽고 싶다고?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으로 봐서 어떻게 하면 네 시간이 따로 주어질까?

네, 간단해요. 학원 하나쯤 줄이면 돼요. 근데 엄마는 절대로 안 된대요. 그래서 답답해요.

녀석, 그렇다고 포기하면 어쩌나. 엄마가 충분히 이해하도록 차분하게 말씀드려봐. 미리 안 된다고 네 생각을 접어두기보다는 한번 이야기해서 안 되면 두번, 그리고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여쭈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엄마도 네가 책을 열심히 읽고자 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선뜻 들어주실 거야. 더구나 다른 일도 아니고 애써 책을 읽겠다는 데 마다할 부모는 없어. 그렇지만 이것은 알아야 해. 책을 읽는다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지런히 읽어야 해.

'작심삼일'이란 말 알지? 어떤 하나의 일을 두고 흐지부지한다면 차라리 아니함만 못한 거야. 네 결심이 충분하다면 엄마도 네 뜻을 저버리지는 않을 거라 확신해. 힘내. 인서야.

그렇다면 책은 왜 읽어야 하는 걸까. 물론 어떤 목적을 갖고, 무엇을 깨우치기 위해서 읽어야 하겠지만, 난 그런 독서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책은 그냥 재미로, 즐겁게 읽으면 그것으로 만족해. 똑 무슨 책을 한정해서 가려 읽는 건 좋은 독서방법은 아냐. 그냥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책을 읽는 거야. 알겠니?

네, 저도 그러고 싶어요.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요. 하지만 당장에 그 책들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게 안타까워요. 그래도 엄마는 내가 책 읽기보다 학원 다니는 걸 더 좋아해요.

그건 네 생각이야. 왜 엄마가 네가 책 읽는 데 반대한다고 생각하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건 아마 평소 네가 책 읽는 게 못마땅한 모습을 보였던 거야. 생각해 보렴. 그렇지 않아? 엄마도 네가 진심으로 책 읽는 데 열의를 보이면 기꺼이 찬성할 거야. 문제는 네 의지에 달렸어.

인서야, 애써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 특히 네 나이 때는 단 한 권의 책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 엄마도 그것은 충분히 아실 거야. 오늘 다시 한 번 말씀드려 보렴. 진실한 네 마음이 결국 엄마를 감동시킬 테니, 알았지?

네, 선생님. 저녁 먹으면서 말씀드려 볼게요. 선생님이 차근차근 말씀해 주시니까 힘이 나요. 그런데 선생님, 그냥 재미로, 닥치는 대로 읽어라 하셨는데,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정말 아무 책이나 읽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다. 배고플 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온갖 잡동사니를 넣어 비빔밥을 비벼먹듯이 그렇게 읽어라. 세상에 '좋지 않은 책', '나쁜 책'은 없어. 단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지.

인서야, J.A 랭포드가 <책을 기림>이란 글에서 현명한 사람은 책을 가려 읽는다고 했어. 모든 책을 '친구'라는 신성한 이름 아래 등급을 매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그들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알고, 몇 권의 책은 붕우지기로 받아들이고 가장 소중한 소유물로 아낀다고 했어. 물론 그렇다고 그 밖의 책들은 잠깐 동안의 소일거리로 하고는 제쳐놓지만, 결코 잊지는 않지. 이해가 잘 안 되지.

하지만 반고가 황금을 상자에 가득 채우는 게 자식에게 경서 한 권을 가르치는 일만 못하고, 자식에게 천금을 주는 게 그들에게 한 가지 재주를 가르치는 일 같지 못하다는 말뜻을 곰곰 새겨봐. 네가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될 거다. 책 속에 길이 보인다고 했어.

인서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물체 중에서, 책은 우리와 가장 가까워. 책에는 우리의 사상, 의욕, 분노의 환상, 진리에 대한 애정, 우리의 과거로 쏠리는 외고집이 담겼어. 그러나 무엇보다도 책은 인생의 급소를 완전하게는 치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과 흡사해.

암튼 책을 읽고 싶다는 너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했구나. 머리 아프지? 그렇지만 난 네 의견을 존중하고, 한껏 부추겨주고 싶구나. 어쨌든 엄마께 말씀 잘 드려서 네가 소망하는 책 읽기가 가능했으면 해.

봄에는 논밭을 갈고 씨뿌리고, 여름에는 왕성하게 자라고, 가을은 모든 생명들이 겨울을 대비하여 에너지를 비축하는 시기지. 곡물들은 씨앗의 형태로 모양을 바꾸고, 곰은 동면 준비를 위해 먹이를 잔뜩 먹어둔단다.

따라서 가을에 곡식을 차곡차곡 창고에 쌓아놓듯이 머릿속에 지식을 담아두기에도 적절한 시기야. 하늘이 맑고 기온과 습도는 적당하며, 들판의 곡식은 풍성하고 수확을 앞둔 상태의 평온함은 다른 계절에 비해 책읽기에 더 쉽게 집중하는 때라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

가을이 독서의 계절인 이유는 들판에서 곡식을 거두어들여 추운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봄을 기다리듯이 책 속에서 지식을 거두어 들여 지금의 낡은 껍질을 깨우치고 인생의 밝은 날을 준비하기 위함 때문이야. 근데, 책을 읽는데 굳이 계절을 따질 필요는 없어. 책은 언제든 읽어도 좋아.

인서야, 너는 특별해. 너는 너이기 때문에 특별하단다. 특별함에는 어떤 자격도 필요 없으며, 너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단다. 네가 가진 게 많기 때문이 아니라, 넌 너이기에 행복해야 해. 잊지 마렴. 넌 언제나 특별하며, 난 널 사랑한단다. 네 바람 꼭 이뤄내기 바래. 난 너의 하고자 하는 의지를 믿어.

|박종국 독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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