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국
헨리 밀러는 가녀린 풀잎같이 미약한 생물이라도 주목을 받는 순간, 그것은 신비롭고 경이로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하나의 우주가 된다고 했다.
이른 아침 고샅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몸을 낮추면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은 정녕 아름답다. 몸을 낮추는 일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낮은 문이다. 몸을 낮추니 작고 하찮아 눈에 띄지 않았던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섬세한 색과 그 빛에 마음이 열린다.
사람은 누구나 높은 곳을 좋아한다. 사랑과 명예, 지위와 물질적인 부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가득 채우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 아무리 애태우고 눈물 흘리며 기도해도 뜻한 바대로 되지 않는다. 일단 욕심을 가지면 명예를 높이고, 재산을 늘리고, 학문을 쌓고, 지혜를 찾아도 늘 마음은 허전하다.
먼저, 내 마음의 항아리에 든 욕심을 버려야한다. 물처럼 소박하고 담담한 마음의 항아리에 티 없이 맑고 진실한 이야기를 가득 채워야 한다. 문득문득 스치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더불어 생각이 활짝 열어야 한다. 그런 바탕이라면 파란 가을하늘을 담고, 함초롬히 영근 풀꽃도 다 품어 안는다.
우선 나부터 욕심 버리기가 잘 안 된다. 조그만 일 하나도 더 차지하려고 바동대는 모습이 역력하다. 더 나은 행복그림이 비춰지는데도 사소한 일에 천착하여 기존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조급해하고, 대범한 처세를 하지 못한다. 실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일찌기 링컨의 사내 낫살 마흔이면 제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했는데, 이순의 문턱을 넘어선 지 몇 해건만 아직도 숱한 일에 자아정체감을 잃고 산다.
잇달아 부음이 전해졌다. 환절기라 예견한 일이기는 하나, 세 분 다 팔순에 이르지 못한 채 아까운 나이로 영면했다. 살아생전 손발이 닳도록 애썼던 망자이기에 조문을 하면서 그 삶이 절절했다.
이순에 이르면 축의금 전달 만큼이나 조의금 낼 일이 많아진다. 부모를 앞세우고, 형제를 떠나보내는 나이다. 갓 스무살 무렵 큰 삼촌의 죽음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망자의 모습을 직접 본 일은 없었다.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들여다 본 망자는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마치 고요한 숙면의 세상이 든 사람처럼.
이후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때마다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지내놓고 보니 어느 일 하나 달리 살았던 적은 없었다. 그제도 그랬다. 보다 진중하게, 치열하게 살겠노라고 자신하기에는 본인 부고를 전하고 먼저 떠나는 망자였다.
페르시아 제국과 이집트 유럽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많은 땅을 정복한 알렉산더대왕이 스무살 나이에 왕이 되어 세계를 정복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더는 정복할 땅이 없으니 나는 이제 심심해서 어떡하나?"
그런데 10년 넘게 계속된 원정 생활에서 오는 피로와 병사의 반란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의 나이 33세에 불과했다.
로마 대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병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많은 명의가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수없이 불려 왔지만, 아무도 그를 낫게 하지는 못했다. 당황해하는 대왕의 주변 사람과는 달리 알렉산더 대왕은 침착했다. 그의 얼굴에는 병색이 짙어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으나, 그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신의 주변을 정리해 가면서 죽음을 준비했다. 신하에게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라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게. 사람이란 죽으면 잠을 자게 되는 법. 살아 눈 뜨는 이 순간을 어찌 잠으로 허비하겠는가.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시간을 가장 충실하게 보내리라."
그러던 알렉산더 대왕의 병이 점점 더 깊어져 자리에 앉을 힘조차 없게 되었다. 왕실에서는 이미 병색이 짙은 그를 포기한 상태라 '그의 마지막 유언이 무엇일까'하고 궁금해했다. 하지만 사경을 헤매면서도 알렉산더 대왕은 좀처럼 유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알렉산더 대왕은 모든 사람을 불러놓고 힘겹게 입을 열어 띄엄띄엄 말했다.
"내가 죽거든 손을 관 밖으로 내놓아 남이 보도록 하시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초조하게 그의 유언을 기다리던 신하는 의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었던 왕의 유언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은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세상 사람에게 천하를 한 손에 쥐었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할 뿐이오."
이처럼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은 우리가 이 세상을 뜰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남을 속이고 해치면서까지 많은 부와 명예를 차지하려고 바동대는가?우리는 누구나 빈손으로 갈 뿐이다. 망자를 조문할 때마다 그 사실이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우리의 삶에서 남겨야 할 게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가는 게 참다운 삶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
|박종국에세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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