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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광주 5.18 25주년, 묻어둔 이야기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5. 5. 1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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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했던 것이지요, 살아남은 것이.."
[5.18 25주년] '사수대' 이기홍씨와 함께 무등산에 오르다
  서종규(gamguk) 기자
▲ 무등의 어깨에서 쏟아지는 햇살
ⓒ2005 서종규
무등의 어깨에서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빛(光) 고을(州) 광주라고 부른다. 사방 산으로 둘러싸여진 호남평야의 한 분지에 빛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을이다. 광주의 사람들은 빛을 받고 살기 때문에 스스로 빛이 되기를 노력한다. 세상에 가장 좋은 계절인 오월이면 더욱 광주의 빛이 싱그럽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 앞 전일빌딩 옆 건물인 구 YWCA 사수대로 2층을 지킨 이기홍(45·광주 금파공고 교사) 선생에게 연락이 왔다. 오월에 꼭 무등을 한 번 오르고 싶단다. 5월 14일 토요일 오후 시간을 잡았다.

▲ 지산유원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모습
ⓒ2005 서종규
오후 2시 30분에 지산유원지에서 출발하여 바람재-토끼봉-동화사-중봉-서석대-입석대-장불재-중머리재-증심사에 이르는 토요일 오후에 산행하기에는 무리인 6시간 코스였다.

사실 무등산을 오르는 길은 너무 많다. 대표적인 출발점이 증심사에서 출발하는 길과 무등산장에서 출발하는 길이 있다. 그렇지만 무등산을 오를 수 있는 길은 너무 많아서 다 셀 수도 없다.

바람만 태운 리프트가 머리 위를 지나고...

70~80년대 무등산을 리프트로 오를 수 있었던 지산유원지의 옛 영화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겨우내 멈추어 있었던 리프트가 대부분 바람만 태운 빈 자리로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리프트의 정상인 전망대에는 등산객과 연인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 일행 다섯 명은 전망대를 넘어 바람재 방향으로 들어섰다. 오월의 무등은 싱그러운 초록의 향연에 가득했다. 계속 나뭇잎들이 고개를 내밀고 출렁거렸다. 길가에 피어 있는 양지꽃이며 제비꽃들, 그리고 초록의 나무에 눈 내려 앉아 있듯이 하얀 이팝꽃이며 아그배꽃이 산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계곡 아래까지 빽빽하게 둥지를 틀고 있는 소나무들도 새 순을 내고 있었다.

▲ 무등산에 자란 소나무
ⓒ2005 서종규
유난히 새들의 울음소리가 맑았다. 휘파람새의 울음이 계속 울려 퍼졌다. 우리들은 입으로 휘파람새의 울음에 화답을 하였다. 휘파람새가 '후 휘-위위-휙' 하고 울면 우리 다섯 명은 일제히 '후 휘-위위-휙'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바람재로 이어지는 능선이 내내 우리는 다른 말을 거의 하지 않고 계속 휘파람새의 울음에 화답하였다.

"휘파람새 울음이 친구의 넋인 것 같아"

나는 "왜 저 새들이 계속하여 따라오지요?"라고 물었다. 이기홍씨가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저렇게 울며 따라오는 휘파람새의 울음이 꼭 그 때 YWCA를 지키다 총에 맞고 떠난 옆 친구의 넋인 것 같아요."

나는 그래서 물었다.

"그 때 그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하나요?"

"못해요. 그래서 더욱 서럽군요. 얼굴은 생생한데, 이름은 잊어 먹어 버렸어요. 손을 맞잡고 꼭 사수하자고 약속했는데…."

말을 잇지 못하는 이기홍씨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래서 휘파람새의 울음에 계속 화답을 보냈나 보다.

▲ 바위들이 어우러져 있는 너덜강의 모습
ⓒ2005 서종규
바람재에서 토끼봉으로 가는 길은 무등산을 뚫어 놓은 신작로이다. 단풍나무로 된 가로수들이 붉은 빛으로 새 잎을 내밀면서 팔랑이고 있었다.

토끼봉 옆 너덜강약수터의 물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무등을 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씻어주는 정화수 같았다. 아마도 무등산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토끼봉에서 동화사 옛터로 오르는 길은 아주 가파르다. 무등산에서 가장 가파른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도중에 너덜강에서 쉬었다. 무등산의 특징은 다양하지만 군데군데 너덜강들이 있다는 것이다.

너덜강은 커다랗거나 작은 바위들이 무더기로 널어져 있는 곳을 말한다. 넓게는 봉우리 비탈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곳도 있고, 한 두마지기 밭두렁만큼 널어져 있는 곳도 있다.

▲ 무등산 너덜강 약수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등산객들
ⓒ2005 서종규
동화사 옛터를 오르면 중봉까지 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능선에는 군데군데 철쭉이 지고 있었다. 80년대 군부대의 주둔으로 사람의 접근이 금지된 중봉이었는데, 지금은 군부대 철수로 방송사의 송신탑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개방되어 있었다. 군부대 터는 생태계 복원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어서 무성한 억새와 알맞게 자란 주목나무들이 활기찼다.

▲ 철쭉꽃이 피어 있는 중봉의 능선에서 바라본 무등산 천왕봉
ⓒ2005 서종규
중봉에서 서석대로 올랐다. 무등산에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서석대이다. 무등의 주봉인 천왕봉(1187m)은 군부대로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다.

서석대는 이름 그대로 상서로운 빛이 쏟아지는 무대라는 뜻이다. 등이 없어 부드러운 곡선이 어머니 같은 산이라는 무등산도 서석대, 입석대, 규봉암, 새인봉의 바위만은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 중봉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일행들
ⓒ2005 서종규

죽을 줄 알면서 마지막까지 남은 까닭

서석대에 앉아 준비해간 막걸리 한 잔을 주위에 뿌렸다. 이 때 동행한 이태영 선생이 물었다.

"이 선생, 어떻게 죽을 줄 알면서 YWCA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어?"

이기홍 선생이 대답했다.

"80년 5월 26일 밤에 항쟁 지도부에서 지침이 내려졌지요. 내일 새벽에 군인들이 진입해 올 것이니, 집에 돌아갈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라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을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그래서 고등학생 이하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지요. 그리고 집으로 갈 사람들은 모두 갔구요."

▲ 무등산 서석대의 모습
ⓒ2005 서종규

이기홍 선생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비겁했던 것이지요. 살아남아 있는 것이. 나는 도청 앞 전일빌딩 옆에 있는 구 YWCA 2층 사수대에 있었어요. 군인들이 진입해 들어오자 1층에서 지켰던 친구들은 모두 총에 맞아 죽었지요. 나도 1층으로 쫓아가야 했었는데…."

서석대에서 바라본 광주시의 모습은 매연에 가려서 아련했다. 하지만 광주의 하늘에 떠 있는 해가 빛났다. 우리의 일행은 광주 하늘에 떠있는 석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 무등산 입석대의 모습
ⓒ2005 서종규
▲ 무등산 중머리재에서 바라본 광주 하늘의 석양
ⓒ2005 서종규

2005/05/17 오전 11:20
ⓒ 2005 Ohmynews

 

"미완의 과제 해결해야"... 5·18 25주년 추모제 열려
25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앞두고 추모열기...18일 기념식 예정
  강성관(anti-20) 기자
▲ 17일 오전 국립5·18묘지에서 열린 '5·18민중항쟁 제25주년 추모제'를 마친 유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2005 <광주드림> 안현주

▲ 추모제에 앞서 유족들이 전통 제례를 지냈다.
ⓒ2005 <광주드림> 안현주
지난 80년 5월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는 '5·18민중항쟁 제25주년 추모제'가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주관으로 17일 오전 국립5·18묘지에서 열렸다.

이날 추모제에는 희생자 유족들은 물론 김원기 국회의장, 박광태 광주광역시장 등 정치인, 광주국제평화캠프 참가자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에 앞서 정수만 유족회장, 김후식 부상자회장, 이성길 유공자회장 등 5월 단체 대표들은 전통 제례를 올렸다.

추모사에 나선 김원기 국회의장은 "5·18광주는 의로운 투쟁의 금자탑으로 전 세계 시민의 가슴 속에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과거가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현재로서 언제나 살아 숨쉬고 있다"고 말했다.

정수만 유족회장 "미완의 과제 해결해야"

이어 김 의장은 "5·18광주는 비폭력과 평화의 정신, 높은 시민의식을 담고 있어서 세계 민주화 운동사에 더욱 빛나고 있다"며 "자유, 민주, 평화의 5·18정신을 더 크게 진작시켜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경제번영으로 완성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광태 광주광역시장도 추모사에 나서 "이제는 이 땅의 민주발전과 인권, 평화를 진전시켰던 5·18을 전국화 세계화하는데 더욱 노력해야 할 때"라며 "5·18의 위대한 시민정신을 바탕으로 온 시민의 지혜와 역량을 결집해 1등광주로 우뚝 세워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정수만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지난날은 명예회복을 위한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당사자 뿐아니라 모든 민주인사와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기로 명예회복이 됐다"며 "이에 대해 항상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 회장은 과거사법 제정을 언급하면서 "미완의 과제들을 해결해 진실을 명확히 드러내야 한다"면서 "그렇게 돼야 5·18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함께 계승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추모식은 김원기 국회의장·박광태 광주시장·박석무 5·18민중항쟁 기념행사위원회위원장 등의 추모사, 문병란 시인의 추모시 낭송, '시를 노래하는 달팽이'의 추모 공연과 헌화 및 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추모식은 시종 엄숙하게 진행됐고, 추모식을 마친 일부 유족들은 묘역 곳곳에서 흐느끼기도 했다. 나점례 할머니는 김상구(당시 23)씨의 묘비석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나 할머니는 묘비석 옆 아들의 사진을 가리키며 "우리 아들 이쁘지라, 아이고…"라며 "얼마나 식구들에게 잘했는데"라며 오열했다. 나 할머니는 "(80년 신군부가) 무지막지하게 (시민을) 죽여놓고 그놈들은 살아있네, 환장하것네"라며 "그놈들 죽는 것을 보고 죽어야 할 것인디…"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 한 유족이 추모제를 마친 이후 자식의 묘역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왼쪽). 유치원생이 한 희생자의 묘역앞에서 참배하고 있다.(오른쪽)
ⓒ2005 강성관

25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앞두고 추모행렬 이어져

한편 국립5·18묘지에는 18일 열릴 25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추모식이 열린 17일 오전에도 전남 담양 한빛고등학교 학생 100여명과 서울시민 100여명 등이 참배 행렬에 동참했다.

또 이날 오전 한화갑 민주당 대표, 이낙연 민주당 원내대표 등 민주당 당직자, 민주당 소속 지방의원 등 80여명이 참배했으며, 이종걸 의원·유인태 의원 등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참배도 이어졌다.

국립5·18묘지를 방문한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광주 5·18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들에게 마음의 고향이었다"면서 "광주시민은 정말 위대했다, 이곳을 올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나는 순간이 많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종걸 열린우리당 의원은 정치인들의 추모 행렬에 대해 "이제 한나라당 의원들도 참배를 하게돼서 다행이다"면서 "정치인들이 광주와 전라도 민심잡기 경쟁에만 그치면 안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광주항쟁과 희생자들의 유지를 받들어 민주개혁과 사회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오후 2시부터 전남도청 앞 특설무대에서는 `대동 줄꼬기' 행사를 시작으로 시민 6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5·18민중항쟁 제25주년 기념 전야제'가 '5·18민중항쟁 제25주년 기념행사위원회' 주최로 열려 80년 5월의 함성을 재현한다.

전야제에서는 길놀이, 무대행사, 대동줄다리기 등이 5시간여 동안 진행된다. 금남로 일대에서는 80년 당시 대동세상을 꿈꾸던 시민들을 위한 '주먹밥 나누어 주기' 등 체험 행사도 열린다. 행사위원회는 18일 오후 특설무대에서 '진실 평화 그리고 연대를 위한 성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대학 총학생회 등이 주최하는 행사도 이어진다.

또 17일 오후부터 20일까지 전남대 국제회의동에서는 '80년 해직언론인협회' 주최로 80년 5·18 당시 언론 사찰 문서, 검열 기사, 사진 등이 전시된다.

17일 오전에는 전남도청 직원 1000여명이 국립5·18묘지를 참배해 눈길을 끌었고, 송병태 광주 광산구청장과 김재균 북구청장도 직원들과 함께 묘역을 찾아 헌화, 분향했다.

▲ 이날 전남도청 직원 1000여명도 국립5·18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2005 전남도청

▲ 처음으로 80년 광주 5월의 참상을 타전한 독일 언론인 위르켄 힌츠페터씨가 추모제에 참석해 상념에 젖기도 했다. 바로 옆 그의 부인은 시종 눈시울을 붉혔다.
ⓒ2005 <광주드림> 안현주

18일 오전 25주년 기념식... 노 대통령 등 2천여명 참석 예정

한편 18일 오전 10시에는 국립5·18묘지에서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25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다. 25주년 기념식에는 유가족은 물론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부처 주요 인사,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박근혜 한나라당 대표·한화갑 민주당 대표 등 2000여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한나라당은 호남 껴안기 차원에서 지난해부터 당 대표 등 지도부는 물론 의원들이 대거 국립5·18묘지 참배에 나서고 있다.

한편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은 지난 2001년 12월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이 제정되고, 2002년 7월 5·18 신묘역이 국립묘지로 승격된 후 지난 2003년부터 국가보훈처가 주관하고 있다.

전국 곳곳서 5·18추모 행사

5·18민주화운동이 25주년을 맞고 있는 가운데 17일 5월 정신계승과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전국에서 열렸거나 열릴 예정이다.

부산5·18 25주년 행사위원회는 부산 민주공원과 서면 일대에서 17일부터 오는 29일까지 5·18 25주년 부산시민한마당 등을 개최한다. 이날 오후 전북대 교정에서 재야단체 회원과 대학생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북지역 5·18 관련 최초 사망자인 고 이세종(당시 21세. 전북대 농학과 2년)열사 추모제를 개최했다.

5·18 유공자동지회 대전·충청지부는 이날 저녁 7시 대전 평송청소년수련원에서 기념식을 열고 갖가지 문화행사를 벌일 예정이다. 대구·경북지부와 전북지부 역시 각각 대구백화점 광장, 전주 삼성문화회관 광장에서 기념식과 음악회 등을 열었다.

18일 기념일 당일에는 서울 종교공원과 부산 민주공원에서 각각 기념식과 항쟁미술제 개막식이 열릴 예정이며 전주시청 강당에서도 5·18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다. 인천에서는 오전 11시 부평역 광장에서 기념식과 사진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밖에 전남 목포, 순천, 해남, 화순 등지에서도 행사위원회가 구성돼 다양한 추모행사를 개최한다.

2005/05/17 오후 5:04
ⓒ 2005 Ohmynews

 

 

 

5.18은 민족의 지평선입니다
[특별기고] 김준태 시인의 5·18민주화운동 25주년 기념시
  오마이뉴스(news) 
모두가 '5월 광주'에 관해 침묵하던 1980년 살벌한 계엄사의 검열을 뚫고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여 십자가여'를 발표했던 김준태 시인이 5·18민주화운동 25주년을 맞아 시 '5·18은 민족의 지평선입니다'를 오마이뉴스에 보내왔다.

김 시인은 이 땅의 모든 비극은 '분단'에서 비롯됐음을 지적하고 그 원인이 민족외부(외세)의 모순 못지 않게 민족내부의 모순에 있다고 개탄하며, 남북통일보다 먼저 남남통일이 이뤄져야 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오월에서 통일로!'가 이번 김준태 시인이 보내온 시의 화두인 것으로 보인다...편집자 주



5.18은 민족의 지평선입니다
-잊지 말자 그리고 기억하자(Vergessen nicht und Erinnern!)
베를린 근교 작센하우센 나치수용소 정문에 새겨진 대형글자판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살아남은 우리들―
그 뜨거웠던 가슴 죄다 식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빗발처럼 쏟아지던 총소리, 살을 찢는 총소리 속에서도
하늘밥을 만들어 서로 나눠먹던 그 아름다운 사람들

차마 어찌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동나무 오동꽃, 찔레나무 찔레꽃 저리 향기 높은데
우리들 어쩌자고 망각의 잔을 마셔버릴 수 있겠습니까

잠꼬대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같이 굳은 맹세였던 우리들―
분단조국의 사생아가 진두지휘하는
탱크와 군홧발에 짓밟힌 님들의 눈물은
죽지 않고 땅에 스며 이 나라 뿌리를 적시는데
술 몇 잔에 비틀거릴 수는 없습니다

세월이 병들고 시대가 병들어도
우리는 방황할 수 없습니다
총소리 총소리 총소리 속에서도
모두가 한 몸 되어 싸우고, 나눠먹고,
어루만지고, 쓰러지고, 다시 손잡고 일어섰던

죽고 못살게 귀여운 새끼들을 낳는
우리 사랑 한반도 여기 청춘의 님들이여
전대병원 조대병원 적십자병원, 산부인과 병원마저
총상환자들로 가득 넘치던 1980년 오월 그 날의 광주―
아 영원한 청춘의 도시 빛고을의 푸르렀던 님들이여

5·18은 역사를 갈아엎어 밭을 일구고
피에 넘치던 논바닥의 물꼬를 텄습니다
일망무제 하늘 저편까지 펼쳐진 그리움이었습니다
무등산 심심산천의 백도라지도 금남로로 충장로로
뛰쳐나와 엉엉 울며 손과 손을 마주잡은 바다였습니다

아우성과 피투성이로 무너져 내린 절벽 앞에서
절뚝절뚝거렸던 우리들의 끝나지 않는 사랑이여
5·18은 해마다 해마다 첫울음으로 태어나서
아장아장 하얀 발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월 그 날이 오면 저렇게 눈부시게―

아기부처, 아기 예수처럼 걸어갑니다
어린 다윗처럼 엉터리 바보 골리앗을 때려눕힙니다

아아 그 해 오월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난
상처뿐인 광주가 가르쳤으니
땅 위에 씨앗을 뿌리면 밭이 되지만
땅 위에 뿌리지 않으면 총칼이 쌓입니다!

사랑과 평화는 총구멍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젖내음도 향그런 어머니인 대지의 밑창에서 태어납니다!

그리하여 에헤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5·18은 청산에 청산에 청산에 살어리랏습니다
무등산과 지리산, 한라산과 인왕산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우리들 할아버지 할머니
저 순백의 백두산, 백두산의 상상봉으로 달려갑니다

죽어서도
자식들에게 젖꼭지를 물려주는
산 너머 강 건너 흰옷나라 어머니들이여
5·18은 노동의 밭―일하라 일하라 소리치며
지평선으로 아아 지평선으로 멀리 머얼리 펼쳐집니다

5·18은
더 이상 민족반역자 허수아비를 세울 수 없는―
더 이상 민족학살자들의 총칼을 불러들일 수 없는
콩, 보리, 밀, 기장, 벼, 수수, 고추, 마늘.....
온갖 곡식 온갖 생명의 모가지들이 넘실넘실 파도치는
광막한, 아 광활한 지평선입니다 그리운 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5·18은 무덤이 아닙니다
죽고 못살게 껴안아야 할 둥근 씨앗입니다
배달겨레 씨종자입니다 눈물보다 더 맑은 씨종자입니다

헛되고 헛된 흘러간 옛사랑이 아닙니다
첫사랑의 검은 눈동자―역사의 당당한 당당한 키스입니다

피묻은 깃발이 아닙니다
구만리 하늘 펄럭이는 민족민주평화통일의 깃발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십 년 백년이 넘도록 기도하는
정든 산 돌고 돌아, 산꿩도 푸드득 날으는 고향길입니다

아아 사랑과 평화와 민족의 지평선으로 새벽얼굴로 떠오르는
오월이여! 그대 이 땅 예언의 긴 나팔을 불고 있나니 내일이여!
오동나무 진보라빛 꽃 펴오르면 천년만년의 백학무리로 나래 치는
우리 사랑 한반도 오월이여! 두 주먹 모아 쥐던 굳은 맹세여!
이제 가자 어서 가자 우리들 어머니가 목놓아 부르는
저 남남통일, 저 광활한 남북통일의 아름다운 나라로!

김준태 시인은...

194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1969년 고 조태일 시인이 발간하던 <시인>지를 통해 문단에 나온 이후 <참깨를 털면서> <국밥과 희망> <불이냐 꽃이냐> <칼과 흙> <지평선에 서서> 등의 시집을 냈다.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며,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 국문학부 문창과와 대학원 지역문화과에서 학생들에게 시창작 등을 강의하고 있다.

2005/05/17 오전 9:27
ⓒ 2005 Ohmynews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5월의 바람
5.18항쟁 25주기를 맞이하며
  김민수(dach) 기자
▲ 팽나무를 뒤흔드는 바람에 잔가지들과 이파리들은 정신없이 흔들립니다.
ⓒ2005 김민수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오월 그 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80년 오월, 그 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이 군부에 의해 짓밟히던 그 날 청량리역에서 경주행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을 떠났다.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강압과 패배적인 사회의 분위기는 수학여행을 떠나는 우리들에게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드디어 안정을 되찾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수학 여행길에 올랐다.

그 당시에는 단지 '광주에서 빨갱이들의 조종에 부화뇌동하던 이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다행스럽게도 진압되었다'는 정도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시위대가 격렬하게 데모를 하는 가운데 피를 흘리는 진압군들의 모습이 가끔씩 뉴스에 나왔고, 그것을 보면서 분노했다. 시위대를 독려하는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마치 북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이들의 목소리가 저런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교회에서도 폭도들을 무사히 진압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기도와 존경하던 목사님들이 5공화국의 실세들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여는 것을 보면서 그저 광주는 잊혀져갔다.

대학합격통지서를 받은 후 입학을 앞두고 있었을 때 언론에서는 연신 운동권학생들의 지하서클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를 했다. 부모님은 "넌, 오직 공부만 해라. 저런 서클에 가입하면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러나 입학식이 있던 날 선배의 자취방에서 본 광주항쟁 비디오는 충격 그 자체였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들이 거짓이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더군다나 진리만 선포된다고 철썩 같이 믿었던 교회, 목사님들이 거짓을 말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날 밤, 단 한 숨도 자질 못했다.
그리고 한 달이 못 되어 목사가 되길 포기하고,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 교회를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그 당시엔 너무 순수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교회에서 거짓이 진실처럼 선포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 해 대학에 들어가 처음 배웠던 노래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와 '오월가'였다. 역사의 진실을 알고 싶어 신학공부보다는 사회과학공부에 심취를 했고 당시의 금서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내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혁명 같은 바람이 불던 시기였다.

여전히 학원은 자유스럽지 못했고, 자취방도 수시로 형사들에게 털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 늦은 밤에도 바람은 자지 않고, 바람에 뿌리는 더 깊어지는 것이겠지요.
ⓒ2005 김민수
광주이후 해마다 대학가에서는 "광주학살 원흉을 처벌하라"는 시위가 간헐적으로 이어지다 84년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86년 5월에는 인천에서 "미군철수!"를 외치는 시위까지 이어졌고 전국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여느 집 부모님들처럼 어머님과 아버지는 늘 자식 걱정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먼저 어머님이 그리고 아버님은 나중에 아들편이 되어주셨다.

아버님은 86년 건국대 '애학투'(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사건에 관한 뉴스를 보셨고, 그 안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셨단다. 얼핏 뉴스화면에서 아들처럼 생긴 청년을 보았던 것이다. 아들이 계속 전화가 없자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첫 날에는 "저 빨갱이 놈들 다 잡아 죽여야 해"하셨고, 둘째 날에는 "그래도 먹을 것은 주면서 해야지"하셨고, 셋째 날에는 아예 앓아 누우셔서는 "저러니까 학생들이 데모를 하지"하셨단다. 결국은 아들 편이셨다.

나는 그 때 건대현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 이후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87년 5월, 그리고 6월 항쟁의 길목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희생들이 뒤따랐고, 한 시대를 사는 청년, 신앙인으로서 그저 침묵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자랑할 만한 일을 한 것은 아니고 그저 그 당시의 청년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간 정도였다.

졸업을 하면서 다짐을 했다. 평생 운동하는 심정으로 살겠노라고, 변절자가 되지 않겠노라고.

오늘은 5.18을 하루 앞둔 날이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집 앞에 팽나무가 요란스럽게 흔들린다. 저러다 꺾일지도 모를 텐데….

오월의 바람.
80년 5월에 불었던 광풍, 미친바람이 온 강산을 삼켰다. 그러나 그 바람은 결국 나를 미치게 했고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지금은 대학시절처럼 그렇게 뜨겁게 살아가지는 못한다. 그러나 심연에는 그 용솟음치던 그 기운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IMF의 바람이 한 차례 이 나라를 휩쓸고 지나갈 무렵, 나는 한강 동호대교 아래에 서있었다. 몇 년 동안 모았던 적금이며 끌어 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그 바람 앞에 내놓아야 했다. 보증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그 때 실감을 했다. 그때 솔직히 절망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강바람이 어찌나 시원하게 불어오는지 '그냥 툭툭 털어 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오기가 생겼다. 그때부터 나는 '강바람'이 좋았다.

오늘 밤 바람이 제법 세차다.
80년 5월, 과연 지금 이 역사를 보면서 광주영령들은 웃음을 지을지 어떨지 착잡하다.
김민수 기자는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이며 자연산문집<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와 <내게로 다가온 꽃들 1, 2>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오마이뉴스에 실리지 않는 그의 글들은 <강바람의 글모음>www.freechal.com/gangdoll을 방문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2005/05/17 오후 10:00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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