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7년만에 찾은 추석, 한총련 수배자 김지영씨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5. 9. 18. 19:50

본문

728x90
7년만에 찾은 추석, 울고 웃는 모녀
[인터뷰] 한총련 수배자, 첫 공소시효 만료된 김지영씨
텍스트만보기   박상규(comune) 기자   
▲ 7년만에 수배에서 벗어난 김지영씨와 어머니 정화순씨.
ⓒ2005 박상규
엄마는 딸에게 보랏빛 국화꽃 한 다발을 건넸다. 딸은 국화꽃을 받아들고 활짝 웃었다. 엄마는 초가을 햇살아래 환하게 웃는 딸을 끌어안았다. 엄마가 딸을 안아 보는 것도, 딸이 꽃다발을 받아 본 것도 7년 만이다. 7년 만에 서로의 체온을 느낀 모녀는 웃으면서 울었고, 또 울면서 웃었다.

지난 7년 동안 딸과 엄마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만날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벽이 놓여 있었다. 국가보안법은 지난 98년 23살이던 대학생 김지영씨를 '수배자'로 만들었다. 김씨는 상명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고 자연스럽게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대의원이 됐다.

탈퇴서 한 장만 쓰면 7년을 피해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김씨는 "양심을 지키고 싶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김씨는 7년의 수배생활 끝에 지난 14일 자유의 몸이 됐다. 한총련 수배자 중 최초로 공소시효가 끝나버린 것이다. 더 이상 가슴 졸이며 피해 다닐 필요가 없어진 김지영씨를 15일 오후 명동성당 앞에서 만났다.

"7년이 지났지만 제 삶은 23살 때인 98년에 정지 돼 있어요. 가족과 친구들 만나지 못한 채 피해 다니다 보니 20대가 훌쩍 지나가 버렸네요. 지나간 삶과 내 선택에 후회 같은 건 없지만, 아쉬움은 크죠."

김씨는 다른 사람들이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이메일도 없다. 98년 이전에는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고, 이후에는 추적의 빌미가 될까봐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휴대폰이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김씨의 말대로 모든 생활이 98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메일이란 것도 만들어봐야겠다"는 김씨의 말은 참 어색했다.

국가보안법이 소중한 7년의 시간을, 그것도 20대의 절반 이상을 빼앗아 갔지만 김씨의 얼굴은 밝았다. 수배 해제 이후 찾아온 편안함과 자유 때문이었을까. 오랫동안 일정한 거처 없이 피해 다닌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긴장감도 없었다. 수배가 해제됐다는 소식을 듣고 누가 가장 먼저 떠올랐을까.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참 많았어요. 가족은 물론이고 그동안 나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준 모든 사람들이 생각났어요. 나만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좋은 건 아니잖아요. 그동안 함께 수배 생활을 하고, 올해 추석에도 역시 집에 갈 수 없는 한총련 동지들을 생각하면…."

김씨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자유를 얻은 기쁨도 크지만 혼자만 빠져나가는 것 같아 여전히 한총련 수배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단다. 이런 김씨에게 수배 생활 중 무엇이 가장 힘들었냐는 다소 식상한 질문을 던졌다.

"학교 학생회실을 전전하며 생활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안정적 거처가 없다는 막막함도 컸구요.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주변을 살피고, 긴장하며 살아서 심리상태가 몹시 나빠요.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봐야 할 것 같아요."

김씨는 "97년에 비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는 단서를 달고 위의 대답을 했다. 7년 수배 생활보다 힘들었다는 97년, 김씨는 미술대학 단과대 학생회장을 하며 역시 한총련 대의원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그 때 자의든 타의든 탈퇴서를 썼다.

▲ 김지영씨.
ⓒ2005 박상규
"그 때 양심을 버리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는 걸 알았어요. 정말 부끄러워서 견딜수가 없었어요. 생활이 무기력했고 한동안 밥도 먹지 못했는데 그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총학생회장을 하면 절대로 내 손으로 탈퇴서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수배 생활 때도 탈퇴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어요. 그 고통을 아니까요."

김씨의 대학 전공은 서양화다. 20대 초반에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면서 살겠다는 꿈을 가졌다. 수배로 20대의 대부분을 소진하고 30대로 접어든 김씨의 꿈이 궁금했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꿈을 버린 건 아니에요. 천천히 생각해 봐야죠. 몇 년 동안 그런 여유가 없었으니까.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요. 국가보안법 폐지에 보탬이 되는 운동을 찾아서 계속 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보이지 않으세요?"

김씨는 웃고 있었다. 김씨는 수배생활을 하며 스쳐 지나가듯 먼 발치에서 엄마를 세 번 봤다. 그러나 7년 내내 아버지는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젠 결혼을 한 오빠와 남동생도 역시 보지 못했다. 김씨는 7년만에 가족과 함께 추석을 보내게 됐다.

"아버지는 제가 등을 두드려 주면 무척 좋아하셨어요. 이번에 집에 가면 다시 시원하게 아버지 등을 두드려 주고 싶어요. 그리고 가족과 함께 등산을 하고 싶어요. 우리 가족 원래 가까운 산에 자주 다녔거든요. 가족들과 산에 오르며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 말을 하며 김씨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추석에도 여전히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한총련 수배자들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37명의 한총련 수배자들이 있다. 이들은 올해 추석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김지영씨의 마지막 말은 이들을 향한 약속이었다.

"사회는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믿음이 있어요. 다른 한총련 수배자들 모두 힘냈으면 좋겠어요. 그들이 내년 추석에는 집에서 보낼 수 있도록 밖에 있는 제가 노력할 겁니다. 그들에게 정말 미안하네요."
2005-09-17 12:03
ⓒ 2005 OhmyNews
한총련 정치수배 8년차 첫 공소시효 만료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와 국가보안법 폐지 촉구' 기자회견
텍스트만보기   이철우(cyberedu) 기자   
"국민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 일제에게 비적으로 매도된 것과 같은 것이며 한총련·범민련 등 통일운동 인사의 활동이 온전히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한총련 정치수배관련 첫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람이 나온 가운데 김승교 변호사가 한 말이다.

그는 "개인에게는 다행스럽고 축하받아 마땅하지만 우리는 축하만 할 수 없다"며 "수십 년 간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이 땅에서 싸워 오신 분들이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또 다른 정치수배"라고 지적했다.

김승교 변호사는 "한총련의 죄는 다른 학생보다 더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더 조국을 사랑하고, 더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더 많은 학생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 "한총련은 정당하다. 이적규정 철회하라! 공동선언 이행! 반미 투쟁!" 외치는 참가자들.
ⓒ2005 이철우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아래 국민연대)와 한총련은 15일 오전 명동성당 앞에서 정치수배 8년차인 김지영씨의 공소시효에 즈음해 기자회견을 열고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했다.

김지영씨는 98년 상명대 총학생회장이 되면서 한총련 대의원이라는 이유로 수배생활을 시작했으며 8년이 지나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자유를 찾게 된 것이다.

참가자들은 김지영씨의 공소시효 만료를 축하하면서도 "한총련 관련 정치수배자 40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며 조건 없는 정치수배 해제를 재촉했다.

이들은 회견문을 통해 "한반도의 자주와 평화, 통일 시대를 앞당기는데 걸림돌이 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것"과 "한총련 정치수배자 조건 없는 수배해제"를 요구하였다.

김지영씨는 "아버지와 전화통화에서 '지금은 애물단지 같은 딸이지만 앞으로 딸 잘 두었다고 칭찬받을 때가 있을 것'이라 말씀드렸더니 그냥 웃으시더라"면서 "남북이 통일로 가는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르신들의 길 따라 살겠다"고 다짐했다.

▲ 김지영씨와 어머니가 참가해 기쁨과 회한의 눈물을 짓기도 했다
ⓒ2005 이철우
이규재 범민련 의장은 "부끄러운 근대사에서 학생들이 없었다면 이 민족이 어디로 갔을 것이며 민족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고 반문하면서 "8년간 수배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정치 신조를 지켜낸 김지영 학생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규재 의장은 "민족이 반목할 때도 학생들만은 평화와 통일을 위해 싸워왔고 한총련은 조국의 평화통일을 먼저 주장했을 뿐이며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이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고 강조하고 "첫 마음을 잃지 말고 7천만 겨레의 희망으로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당부했다.

참가자들은 "범민련과 한총련 대표가 6.15평양대축전과 8.15민족대회에 공식으로 참여하는 등 이들에 대한 이적규정은 사실상 무효화되었고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사문화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정치수배자가 여전하고 교수의 논문을 옭아매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8년간 정치수배의 고통을 보여주는 상징의식
ⓒ2005 이철우
이 기사는 인터넷신문 참말로(http://www.chammalo.com)에도 실렸습니다
2005-09-16 14:27
ⓒ 2005 OhmyNews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