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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한센인 차별, 우리는 떳떳한가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5. 11. 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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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한센인 차별, 우리는 떳떳한가
[기고]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텍스트만보기   오마이뉴스(news)   
지난 25일 일본 법원은 일제 시기 피해를 보상하라는 소록도 한센인들의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보상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입니다. 이에 정근식 서울대 교수가 일본 법원 판결의 문제점과 함께 이번 소송이 우리 사회에 던진 의미를 짚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편집자 주>
▲ 일제 강점기 강제 격리 · 수용되었던 소록도 한센인들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청구한 피해보상소송에서 일본 법원이 원고 패소 판결한 것에 대해 27일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센인들이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지난 10월 25일, 소록도에는 커다란 충격과 슬픔, 황당함이 함께 몰려왔다. 소록도 갱생원 입소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보상 소송에서 패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대만 낙생원 입소자들은 동일한 소송에서 승소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두 소송은 함께 진행됐지만, 도쿄 지방재판소의 재판부들이 일본의 '한센병 보상법'의 취지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여 대만 낙생원 소송은 받아들이면서 소록도 소송은 기각한 것이다.

판결이 나고 며칠 뒤 도쿄에서 만난 일본인 대학교수들도 내게 이 결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재판부는 왜 한국 한센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어떻게 동일한 재판소에서 동일한 사안을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었을까.

소록도도 '국립' 요양소로 취급됐다... 일본 환자 이송되기도

일본 재판부는 낙생원 소송에서는 2001년 5월의 구마모토 지방재판소 판결이 "단순한 손해배상이 아니고 정책적인 고려에 근거해서 행해지는 특별한 보상"이었으며, 따라서 현재의 국적이나 주거지와 관계없이 1945년 이전 일본의 '국립 나요양소' 입소자들은 모두 보상 대상에 해당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소록도 소송에서는 한센병 보상법의 심의과정을 검토하면서 "외지 요양소의 입소자는 보상의 대상이 된다고 인식하지 않았거나 혹은 애초부터 보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전제하였다"고 해석했다.

소록도가 일본의 후생노동성 고시에 규정된 '1931년 일본 나예방법'의 국립 요양소와 동일한 '국립' 요양소였다는 주장은 기각됐다.

심지어 1938년 검거된 일본의 나환자절도단 사건의 피의자 22명이 일본에서 소록도로 이송돼 수용된 사실, 소록도 갱생원 원장이 항상 일본 국립요양소 소장회의에 다른 국립요양소장들과 동일한 자격으로 참석했을 뿐 아니라 각종 인사에서 명백히 '국립' 요양소로 취급된 사실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27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는 소록도 한센인.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2001년 5월의 구마모토 판결은 1953년 제정되고 1996년에야 비로소 폐지된 일본의 나예방법이 적어도 1960년 이후 개정되거나 폐지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판결에 따라 제정된 '한센병 보상법'은 그 전문에서 "이전(즉 제국주의 시기)에 시행된 한센병 환자에 대한 격리정책이 1953년 제정된 나예방법에 의해 지속됐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 한센병에 대한 인식의 오류가 명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격리정책의 변화가 없어서 한센병 환자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고난"을 주었다고 표현했다.

그 법에 근거해 마련된 일본 후생노동성 고시에 따라 '국립' 요양소 입원경력자는 입소 시기를 불문하고 보상대상이 됐으며, 1945년부터 1972년까지 미군정이 지배했던 오키나와의 나요양소 및 소규모의 여러 사립 요양소에 입소했던 사람들에게도 보상이 이뤄졌다.

이번 소록도 및 낙생원 소송은 여기에서 제외된 보상에 관한 것이다. 원고와 변호인들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수용'이라는 점이 더해지면서 일본 본토의 요양소에서보다 피해정도가 더 심각했음을 주장했다. 실제로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 소록도 갱생원에서 이뤄진 환자들의 입소·노동·저축·단종수술과 낙태 중 상당 부분은 불법이었다.

갱생원이 사법적인 판결에 따른 '범죄자'를 다루는 형무소가 아님에도 혹독한 구타와 감시 등 징벌이 이뤄진 감금실은 인권침해의 현장이었다.

1941년과 1942년 소록도에서 발생한 두 차례의 사건(1941년 사건은 한센인이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다른 조선인 한센인을, 1942년 사건은 한센인 이춘상씨가 악명높던 일본인 원장인 수호 마사토를 살해한 사건)은 단순한 살인사건이라기보다는 이런 인권침해 및 강권적 지배에 대한 저항이자 절규였다.

따라서 이번 소송은 소록도 입소자에 대한 인권침해를 사과하고 희생자들에게 보상해야 할 뿐 아니라 일본 사법부가 법적 형평성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결론나야 하는 사안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 사법부의 구차한 변명과 일관성 상실을 드러낸 이번 판결은 국제적 웃음거리임에 분명하다.

해방은 됐어도 차별·배제·학살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록도 소송이 주는 역사적 의의가 일본 정부나 사법부를 향한 당위적 결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판적 성찰은 내부를 향할 때 더 빛난다. 이번 소송은 해방 후 우리 정부와 국민이 한센인을 차별한 데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한센인은 20세기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사회적 소수자 집단의 하나 아닌가. 이들은 차별받고 배제됐으며 학살까지 당했던 사회적 타자였다. 이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해방 후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됐다.

1945년부터 1957년까지 이뤄진 각종 학살사건들, 1960년대 초반 소록도 주민들이 피와 땀으로 일궜음에도 선거정치에 말려 빼앗긴 오마도 간척지 사건, 정착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 한센인 2세들과의 공학 반대를 통해 가해진 정신적 폭력 등은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례들이다. 이뿐 아니라 식민지의 유산들이 무의식적으로 답습되면서 '강송'(강제이송), 단종수술 등도 1970년대까지 지속됐다.

▲ 27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는 소록도 한센인.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국가권력은 이들의 인권을 침해한 당사자였고, 일반 시민들의 사회적 차별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계몽과 교육도 시행하지 않았다. 현재 시행되는 중앙등록제나 정착촌 체제도 차별적 요소를 안고 있다.

한국에서 한센인의 문제는 오랫동안 잠복돼 있었다. 이는 과거의 차별이 극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센인에 대한 '비가시화'라는 정부 정책이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군사정권은 한센인들에 대한 일제시기의 절대적 격리체제를 넘어서서 정착촌 제도라는 상대적 격리체제를 창출하였다.

정부는 이들에게 자활이라는 명분과 원조를 통한 물질적 지원을 제공했지만 그러한 지원은 충분하지 않았다. 아울러 일제시대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환자 통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듯 이미지 정치도 매우 강력하게 전개됐다.

감춰진 한센인 차별... 진상파악이 우선

한국에서 독특하게 만들어진 상대적 격리로서의 정착촌 체제는 한센인의 비가시화에 성공했다.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진 한센인들의 다수는 타자화된 자아상을 내면화했고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해본 경험이 별로 없다. 종교적인 요인도 사회적 비가시화에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가시화는 성공적인 정상화와 사회복귀로 보기 어렵다. 한국의 해방 후 한센정책은 일본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보된 길을 걸었으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방치'나 '격리'를 중심으로 한 인권침해체제의 지속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유산을 정리하는 방식으로는 일본에서처럼 소송을 통한 보상운동을 상정해볼 수 있으나 이것보다는 국가가 먼저 문제점을 파악해 처리하는 특별법 제정 방식이 더 적합해 보인다. 무엇보다 과거 인권침해에 대한 정확한 진상파악이 중요하다. 또 외부로부터의 지원과 국가의 보상만으로는 한센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이번 소송을 한센인들의 주체적 각성과 자조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 일제 강점기 강제 격리 · 수용되었던 소록도 한센인들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청구한 피해보상소송에서 일본 법원이 원고 패소 판결한 것에 대해 27일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센인들이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수려한 풍광만 남고, 아픈 과거 잊혀지나
[르포-소록도] 상처 서로 보듬어안고 살아가는 한센인들
텍스트만보기   김덕련(pedagogy) 기자   
▲ 소록도 병원에 현재 입원중인 환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 할머니도 당뇨병 등 노인성 질환으로 고생하다 최근 병원에 들어왔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 곳을 특별한 곳으로 바라보지 말아 주세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하고 노환이 있는 분들이 대부분일 뿐 양성 한센병 환자는 거의 없어요."

소록도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국립 소록도 병원 원생 자치회 관계자와 자원 봉사자 등도 소록도에 거주하는 700여명의 한센병력자 중 양성 환자는 20명 정도라며 이같은 지적에 동의했다. 양성 환자 비율이 극히 낮은 이런 현상은 소록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2000년 기준으로 전국의 등록 한센인 1만8260명 중 양성은 535명에 불과했다.

소록도 한센인들의 평균 연령은 75세에 가깝다. 소록도 한센인들 중에서는 수십 년 간 섬에서만 생활한 경우도 있지만 젊은 시절 뭍으로 나갔다가 나이 들어 몸이 안 좋아지면서 돌아온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 소록도 한센인들은 장애수당 지급을 요청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자치회 사무실을 찾았을 때 김명호 원생 자치회장은 "다른 정착촌과 달리 국립병원인 이곳에서는 장애수당이 지급되지 않아 지난 1월 방문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이 부분을 청원했다"며 "이에 필요한 서류 작업을 하느라 자치회가 요즘 바쁘다"고 소개했다.

김 회장은 "나라에서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고 연령대에 따라 최고 월 5만원 정도의 노인 수당이 나오긴 하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덧붙였다.

생활의 중심축은 종교... 비합리적 차별이 불러온 절대자?

소록도에서는 자원봉사와 물품 지원 등으로 도와주는 종교 기관과 일제 시대 겪은 피해 보상 청구 소송을 지원하는 변호사들(특히 일본)을 거의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종교는 주민 생활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를 믿는 상당수의 주민들은 병사(病舍) 지대에 있는 5곳의 교회에 매일 새벽 4시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천주교(성당 1곳) 신자들도 오전 8시에 모여 미사를 드린다.

이는 종교 기관이 이들에게 먼저 찾아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과 함께 한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차별을 받아온 주민들에게 합리의 차원을 넘어 존재하는 절대자가 필수적이었던 데서 비롯된 것인 듯했다.

▲ 소록도 주민들에게 신앙은 절대적인 듯 했다. 매일 새벽4시 마을별로 있는 교회에 모여 새벽기도하는 것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소록도는 직원 지대(1번지)와 환자 및 병력자들이 거주하는 병사(病舍) 지대(2번지)로 구분돼 있다. 과거에는 이 구분선이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처럼 강하게 주민들의 생활을 틀지었지만 최근에는 그렇지 않다. 물품이 들어오는 통로인 선착장 자체가 별개로 존재(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문을 즈음해 통합)하고 병사 지대에서 직원 지대로 함부로 이동할 수 없는 등 과거에 존재했던 명시적인 구분과 차별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병사 지대 거주자들도 "예전에는 직원들이 원생들을 위에서 통제했지만 이젠 그런 관계가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소록도 중앙공원에서 만난 70대의 한센인 B씨는 "60년대 초처럼 원생이 수천 명 되던 때는 마을마다 각각 기술자가 있어 시설에 문제가 생기면 자체적으로 수리했다"고 과거를 떠올린 뒤 "그러나 사람도 적고 워낙 노령화된 요즘에는 그런 문제가 생길 경우 직원들이 해결해 준다"며 달라진 관계의 일면을 설명했다.

소록도는 인근 녹동항에서 배로 5분도 채 안 걸린다. 섬 모양이 '작은 사슴'(小鹿)을 닮았다고 해서 소록도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섬에서 역설적으로 사슴은 골치덩어리다. 예전에 산에 풀어놓은 사슴들이 최근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슴이 농경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높이가 1m가 넘는 철조망을 친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을 보는 관광객, 가려지는 과거

육지와 가까운 데다 경관이 수려하기 때문에 소록도를 찾는 관광객도 많다.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가 엄격하게 구분돼 병사 지대에 들어갈 수 있는 외래인은 환자를 면회하러 온 사람 뿐이던 과거와 달리, 7~8년 전부터는 병사 지대가 일부 개방된 상태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병사 지대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엔 못 들어가지만 소록도 병원을 지나 중앙공원 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다.

▲ 소록도 병사지대 일부가 최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면서 소록도를 방문하는 이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러나 상당수 관광객들의 관심사는 가위손의 솜씨를 빌린 듯 잘 정돈된 조경과 수려한 풍광인 듯했다. 이들은 깔끔하게 정리된 '오늘'에만 초점을 맞출 뿐 오늘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오늘과 공존하는 소록도의 '과거'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였다.

중앙공원에 있는 소록도 역사 및 한센병 자료 전시관과 검시실, 감금실에서 만난 관광객들 중에는 전시관에 있는 소록도 역사에 참여했던 한센인 중 이 섬에 여전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이도 있었다. 대개 이 섬에서 과거에 한센인이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지만 그 속사정을 궁금해하는 이는 많지 않아보였다.

공원에서 만난 50대 한센인 A씨는 "이 곳을 찾는 관광객 중 일제 때 입은 강제노역 피해 보상 청구 소송을 지지하는 서명에 동참한 사람은 반도 안 된다"며 "한센인들이 이 섬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모른 채 겉모습만 훑어보려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소록도에서 오랫동안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김영민씨는 고통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지적했다. "관광객들 중 '돈을 줄 테니 좋은 피부병 약을 달라'고 하는 분도 종종 있다"고 소개한 김씨는 한센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라고 말한다.

평행선 달리는 두 역사의 합류 조건은 상처 보듬어 안기

▲ 한센균이 시신경에 침투해 시력을 잃었다는 이 할아버지는 어릴적 한센병력이 있었을 뿐 여느 시각장애인과 다를 바 없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어 김씨는 "자원봉사자나 병원 직원들 중에서도 이 문제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며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이럴진대 관광객만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지적했다. "자원봉사하러 오기 전에 소록도의 아픈 역사를 먼저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일주일 이내의 짧은 기간 동안 자원봉사하기 위해 섬을 찾은 청년 뿐 아니라 수년간 소록도에서 근무한 몇몇 직원들에게서 "소록도의 역사를 잘 모른다"는 말을 들으며 김씨의 우려 섞인 지적이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 한 직원은 "오랫동안 이 곳에 살았지만 소록도 주민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고 말했다. "노환을 앓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 한센인을 위해 성심껏 일하고 있다"는 그의 의식 속에서도 고통 어린 소록도의 역사는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소록도에는 과거의 고통을 몸과 마음으로 모두 느끼며 살아가는 한센인들의 역사 뿐 아니라 그 옆에서 함께 흐르지만 합류하지는 않는 다른 이들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었다.

5월 1일 오전 자치회 건물 휴게실에서 열린 '일제 강제노역 피해보상 청구소송 경과 보고' 자리에 참여한 이들은 인상적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대만 변호사들과 함께 소록도를 찾은 낙생원의 한센인 란씨와 그 자리에 모인 40여명의 소록도 한센인들이 서로를 껴안는 모습이었다.

상처를 보듬어 안고 고통의 경험을 나누는 모습은 소록도의 그 어떤 풍광보다도 아름다웠다. 주변만을 맴돌고 있는 소록도의 두 역사가 합류하는 날, 나아가 소록도 한센인들의 역사와 섬 바깥의 역사가 행복하게 만나기 위한 전제조건은 고통을 직시하고 나누는 것임을 그들은 말없이 외치고 있었다.

▲ 대만 변호사들과 함께 소록도를 찾은 낙생원의 한센인 란씨(왼쪽)가 소록도 한센인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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