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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는 <오마이뉴스> 보도로 사건이 처음 알려진 지 나흘 만인 28일 대변인 명의로 '노충국 (예)병장 사고 관련 조치'를 발표하고 진상조사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고 노충국씨와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했다. "최선 다했다"던 국방부가 나흘만에 급변한 까닭
국방부가 이렇게 전향적 자세로 급변한 것은 무엇보다 네티즌 여론의 불길이 무섭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윤 장관의 '노심(怒心)'도 크게 작용했다. 윤 장관은 지난 2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노충국씨 사건에 대해 "군으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며 거센 비난으로부터 군 당국을 보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당시 윤 장관의 대답은 국군의무사령부 보고만 충실히 대변한 것이었다. 윤 장관은 전날 밤 12시께 국군의무사령부로부터 관련 보고를 받고 이 같이 밝힌 것이다. 하지만 윤 장관의 답변은 네티즌들의 비판을 더욱 부채질했다. 더욱이 노충국씨가 28일 새벽 끝내 숨지면서 국방부 등에 비판이 집중되자 윤 장관은 '정확한 진상조사'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윤 장관은 크게 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 관계자는 28일 오후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24일) 첫 보도 이후 파장이 커지자 윤 국방장관이 밤 12시 다 돼서 보고를 받았다"며 "당시 보고 당사자가 국군의무사령부였는데, 부랴부랴 보고서를 만들어 보고하려니 제대로 됐겠느냐"고 전했다. 이어 "(의무사령부가) 자기들이 한 것을 (장관에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며 "하지만 장관의 대정부질문 답변 이후 파장이 더 커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모든 사항을 오늘(28일) 다 보고했고 장관이 정말 분노했다"며 "그래서 급하게 합동조사단 구성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진상조사 급물살... 28일 이미 국군광주병원에 합조단 급파 윤 장관의 분노를 불러온 데는 국방부의 '미온적 대처'가 결정적이었다. 따라서 윤 장관이 직접 나서자 진상조사도 매우 신속하게 이뤄지고 있다. 합동조사단은 28일 오전 고 노충국씨가 진료를 받은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내려가 노씨 진료를 맡았던 군의관 등 관련자에 대해 1차조사를 벌인 것으로 확인됐다. 국군광주통합병원 진료부장은 "오늘 (합동조사단이) 왔다 갔다"며 "이미 고 노충국씨 진료를 담당한 군의관 2명을 조사했다"고 전했다. 국방부의 또 다른 관계자는 "대외적으로는 11월 1일부터 조사한다고 돼 있으나, 오늘 오전 장관 지시로 급히 광주로 파견됐다"고 말했다. 윤 장관은 또 고 노충국씨 사망 사건 이후 이어지는 후속 보도 대상자들에게도 신속하게 대응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노씨 외에도 군에서 중증 질환을 얻어 고생하는 사병들을 더이상 방치하지 말라는 얘기다. 국방부 관계자는 "현재 장관은 여러 채널을 통해 (고 노충국씨 사건을) 보고받고 있다"며 "<오마이뉴스> 후속 보도에 나오는 사람들도 모두다 빨리 국가보훈처 심사대상으로 올려 심사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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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8일 오전 8시55분]
2년2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면 "내 인생도 활짝 필 것"이라며 꿈에 부풀어 있던 28세의 청년 노충국씨. 그러나 그는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노씨는 군 생활 내내 전역 후의 희망찬 삶을 꿈꿨다. 이런 그의 꿈은 한권의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27일 노씨가 사망한 뒤, 가족들은 그가 입대 직후부터 계속 써내려간 일기장을 공개했다. 2003년 6월부터 2005년 5월까지 기록 일기장은 입대 후 육군에서 지급하는 165페이지 분량의 '수양록'으로, 노씨가 신병이었던 2003년 6월부터 병장 진급하고 제대를 한 달 앞둔 2005년 5월까지 군 생활이 기록돼 있다. 일기장 곳곳에서는 "중대 생활 잘하고 솔선수범하자", "남은 군생활은 건강하게 활기차게 지내보자"라고 다짐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올해 4월에는 활짝 핀 개나리를 보면서 "내 군 생활에도 봄날이 왔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또 여자친구의 이름과 "사랑한다"는 수줍은 고백도 들어있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도 가득하다. 2004년 10월 부대 주변 산들의 단풍을 바라보던 노씨는 "(제대하면) 내가 이젠 부모님을 모시고 좋은 곳을 많이 가야지"라고 다짐
노씨는 입대할 때부터 건강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일기장을 시작하면서 쓴 '나의 장점'에는 "유머러스하다, 긍정적이다, 건강하다"고 적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운동을 해온 흔적이 여러 곳에 나타난다. "앞으로 운동이나 죽어라 해야지 운동만이 살길이다. 100일 작전 몸짱 프로젝트 ㅎㅎ" (2005년 2월 22일) 노씨의 전역일은 올해 6월 24일. 그는 전역을 두 달 남겨두고 '다이어트와 운동'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일단은 운동을 꾸준히 해서 훌륭한 몸도 만들고 건강해져야지." (2005년 4월 11일) "군생활도 이제 두달 남짓 남았다. 일단 다이어트에 목표를 두고 열심히 신나게 살자." (2005년 4월 22일) 5월 6일 "이놈의 복통은 언제나 나으려나" 노씨는 올해 3월부터 자신의 몸에 이상이 오고 있음을 느꼈던 것 같다. 3월 20일 일기에서 노씨는 "날씨도 많이 포근해졌다"면서 "그런데 봄이라 그런지 몸은 여전히 나른하고 만사가 귀찮아진다"라고 적었다. 9일 뒤인 3월 29일 그는 국군광주병원에서 첫 진료를 받는다. 이후 4월 28일 진료에서는 내시경 촬영과 조직 검사를 했고, 5월 27일 군에서 마지막 진료를 받았다. 이 즈음 노씨의 일기장에는 심한 복통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군 동료들은 당시 노씨가 복통으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고통 때문에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두번째 진료를 받은 뒤인 5월 6일 노씨는 이렇게 적었다. "그나저나 이놈의 복통은 언제나 나으려나. 태어나서 이렇게 오랫동안 아픈 적이 없었는데. 휴가 가서 푹 쉬면 좀 나으려나. … 얼마 남지 않은 군생활, 제발 건강하자." 노씨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품인 일기장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는 전역 직전까지 '위암'을 의심해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월부터 몸에 이상증세를 호소했지만, 군병원측에서 경고했다는 '위암'이라는 단어, 또는 '위암 의증'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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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분합니다. 당신의 죽음, 보고 들으면서 믿고 싶지 않습니다. 어린 아들 키우는 아비로서 가슴놀이가
찢어집니다. 당신 아버지, 그 서러운 절규가 제 귓바퀴를 잡아챕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가끔 부끄러웠습니다만, 이번처럼 배알을 끄집어 내
씻고 싶을 만큼 창피한 적은 없습니다. 도대체 대한민국 국방부는 뭐하는 곳인가요? 다, 부질없습니다. 당신이 죽은 바에야 무슨 소용입니까?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당신이 쓴 수양록, 그 일부만 봐도 당신이 위암은커녕 심한 만성 복통쯤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제보를 받고 취재 요청을 했을 때(지난 여름), 당신 아버지는 거절했다지요. 위암을 모르고 있는 당신이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될까봐 말입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 취재팀은 눈물겨운 부성애를 지켜드리기 위해 보도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지요? 수양록? 그건 국방부 고위직들이 매일 써야 합니다. 자기 자식처럼 군인들을 생각했다면, 그래서 병사를 제일 먼저 염두에 두는 정책을 폈다면 당신의 죽음은, 그리고 당신 경우와 다르지 않을 숨겨진 죽음들은 막을 수 있었고, 또 이어질 몽매하고도 비참한 죽음들은 예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폐쇄된 집단 가운데 하나로 군대를 흔히 꼽습니다만, 국방부가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3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군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병사들에게 PC가 주어지고 노래방이 들어가고, 화상전화로 가족과 안부를 주고받고? 그렇군요. 변하기는 했습니다. 이른바 ‘보여주기정책’은 분명히 변했고 아주 ‘고질’입니다. 대한민국 국방부 만세입니다. 지난 저녁 저는, 오늘과 주말에 2차 수시 막바지 면접을 봐야하는 고3 학생들과 대면했습니다. 이른바 ‘실전면접대비’라는 수업입니다. 법학과에 지원하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다가 노충국씨, 갑자기 당신의 죽음과 그 억울함이 울대뼈를 치받더이다. 참을 수 없었던 저는 준비한 질문지에 없는 말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아침 일곱시에 노충국씨가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학생, 알고 있나요?” 저와 마주 앉은 학생은 모릅디다. 그 자리에 불려나온 세 명 모두 여학생이기는 했지만 그 가운데 당신 사연, 아니 사건을 알고 있는 학생은 단 한 명뿐입디다. 당신 이야기를 충분히 전한 다음 학생들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노충국씨, 당신 가족들이 국방부를 상대로 재발방지를 위해 책임규명소송을 벌인다면 승소할 확률은 얼마나 되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번 일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학생 개인의 생각을 묻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 얼굴에 고민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승소할 확률은 0%입니다.” “책임규명할 필요 있을까요? 어차피 다 집행유예로 빠질 텐데요.” 아,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제가 가르친 아이들 입에서 나온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러나 노충국씨, 깊이 생각해보면 아이들 대답이 맞습니다. 우리 나라 법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은 지나가던 바퀴벌레도 아는 일입니다. 적색범죄에 대해서는 가혹하지만 백색범죄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대한민국 헌법. 아무 힘없는 당신 가족들이 국방부를 상대로 승소할 가능성은 그야말로 ‘제로’지요. 이대로라면, 제 아들 군대 못 보냅니다 노충국씨. 제게는 늦게 장가 들어 얻은 어린 아들이 있습니다. 당신 이름만큼이나 뜻이 깊은 이름을 갖고 있는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인 ‘이잉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온갖 잔병 치례를 하더니 이제 겨우 눈 말똥말똥 뜬 약골 가운데서도 무녀리입니다. 지금도 학교에서 무리하게 자기 주장을 펴다가 가끔 맞고 들어옵니다. 몸이 약하면 주둥이라도 무거워야 할 텐데, 제 아비를 닮아 하고 싶은 말은 꼭 지껄이는 녀석입니다. 이런 군대라면, 저는 하나 밖에 없는 제 아들 군대에 절대로 못 보냅니다. 아니, 안 보냅니다. 허구한 날 가슴 졸이며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군대라면, 안일주의와 복지부동을 깔고 앉아 자기 앞만 가리는 고위직들이 버티고 있는 것도 모자라, 툭하면 오리발 내밀기가 주특기인 국방부, 그들이 주관하는 군대라면 제 아들 절대 못 보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들을까봐, 죽어도 못 보냅니다. 지금 심정이라면 편법이라도 동원해 아들 녀석을 군대에 안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영전에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사실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저는 당신 생전, 건강했던 사진과 죽음 직전의 사진을 번갈아 보며 눈물짓고 있습니다. 만난 적도 없는데 도저히 당신이 남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 아버지, 아! 그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어떤 말로 당신 아버지, 그 찢어지는 슬픔을 위로하겠습니까? 당신을, 당신 사연을 모르는 게 나을 뻔 했습니다. 자식 키우는 아비로서, 제 의식의 한 부분을 차지해버린 당신 모습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저,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군대 안 가는 나라에서 태어나십시오. 당신 영전에 정말 부끄럽지만, 제가 드릴 말씀은 그뿐입니다. 넋이라도 있다면 그저, ‘남은 자의 슬픔’으로 평생 감옥살이하실 아버지 곁을 지켜주십시오,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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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이 너무 짙다. 명암이 갈려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갈릴 수는 없는 일이다. 대다수 신문은 국방부가 어제 발표한 '선진 병영문화 비전'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국일보>는 1면에, <중앙일보>는 2면에, <조선일보>는 종합면에 박스 기사로 크게 키웠다. <경향신문>과 <동아일보>도 사회면에서 꽤 비중 있는 뉴스로 다뤘다. 하지만 같은 날 발생한 고 노충국씨의 사망 사실은 이들 신문지면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한겨레>와 <국민일보>가 사회면 톱기사로 처리한 게 전부였다. 국방부가 불어댄 트럼펫 소리에 한 전역 사병의 신음소리는 묻혀버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국민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열어야 할 언론에 의해 비명소리는 틀어막혔고 팡파레 소리는 증폭됐다. 기사 가치가 다르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선진 병영문화 비전'은 60만 국군장병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고, 고 노충국씨의 경우는 개별 사례에 불과하다는 류의 숫자놀음은 애당초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언론의 덕목이 뭔지 아는 기자라면 그런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래서 고 노충국씨의 사례는 군 의료체계 부실이란 화두와 함께 군 당국의 도덕성 문제까지 제기한 '중의적 사안'이다. 언론에게 '판관'의 역할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고 노충국씨 측의 주장과 국방부의 주장이 다르다면 최소한 기계적인 중립보도라도 했어야 한다. 우리 언론의 '특기' 아니던가. 고 노충국씨 측의 문제제기에 국방부의 해명까지 이뤄졌으니 기사 요건인 '행위의 완결성'은 이미 갖춰진 셈이다. 그런데도 보도하지 않았다. 왜인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의 보도태도가 갈린 것도 아니고, 이른바 메이저 언론 대 마이너 언론의 태도가 다른 것도 아니다. 그저 대다수 신문 대 극소수 신문의 차이다. 이 사실은 신문사의 입장에 따라 고 노충국씨 사례에 대한 판단이 갈린 게 아님을 뜻한다. 정권의 유불리를 판단 잣대로 삼은 것도 아니고, 손님끌기용 선정성을 우선시한 것도 아니다. 그럼 뭔가? 단 하나다. 종이신문의 '알량한 자존심'이 발동했다는 분석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덕분에 우리 병영은 '새마을'이 됐다
그래서 확인한다. 우리 언론이 뉴스를 대하고 다루는 태도가 어떻게 비뚤어져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언론의 선언문이 경우에 따라 어떻게 휴지조각이 되는지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덕분에 우리 병영은 '새마을'이 됐다. DMZ 근무 장병의 위험수당은 '따따블'로 오르고, 컴퓨터도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고, 야간시간은 자유롭게 개인활용할 수 있는 '새마을, 새병영'이다. 아, 또 하나 있다. "앞으로 훈련병에 대한 정밀 관찰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 결함이 드러나면 현역 복무 판정을 취소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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