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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동의 새벽은 총성없는 전쟁터였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2. 2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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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동의 새벽은 총성없는 전쟁터였다
[새벽을 여는 사람들 56]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안갑수씨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진석/김은성(yeongook) 기자   
ⓒ2004 김진석
“빨리요 빨리! 빨리 나가요! 빨리 갖다 주세요!”
이 곳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빨리! 빨리!”를 외쳐댄다.
“오라이! 오라이!”
“딸! 딸! 딸! 딸딸이 지나가요!”
이 곳에선 그 어떤 고급차보다도 손으로 끄는 딸딸이(짐을 배달하는 핸들카)가 가장 빠르다.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종합 도매시장 속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시장사람’ 이라고 부른다. 시장 사람들은 뜨거운 커피 한 잔 조차 식혀 마시는 시간이 아깝다. 그들은 커피를 빨리 식히느라 빈 종이 컵에 이리 저리 옮겨 붓다 단 숨에 커피를 들이켰다.

교통 정리하는 호각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어딘가에서 벌어진 싸움 소리가 마구 뒤섞인 가락시장. 그 곳의 새벽은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2004 김진석
절대로 ‘시장사람’ 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던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낮과 밤이 바뀐 채 살아가는 부모님을 보며 자연스레 삶의 고단함을 일찍이 알아버린 터였다. 왜 그리 사는 게 바쁜지 제 때 온 가족이 모여 따뜻한 밥 한 끼 먹어본 기억이 까마득했다.

그러던 그가 13년 째 '시장사람’ 으로 살고 있다.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받은 누나의 권유로 우연히 찾아든 가락시장.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닮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의 삶을 고스란히 닮아가는 안갑수씨(37) 였다.

ⓒ2004 김진석
“중국집 사장님이 자장면 먹는 것 보셨어요?(웃음) 아휴. 이젠 지겹죠.”

아무리 몸에 좋고 맛있는 나물일지언정 그에겐 생존 도구로서의 의미가 더 강했다. 안씨는 시장 장사를 ‘생업’ 이라 말하며 ‘고단함’ 따위에 콧방귀 뀌는 천상(?) 시장사람 이었다.

처음엔 그 고단함을 술과 담배로 잊으려 했다. 추위와 피곤함을 잊기 위해 술을 벗 삼은 아버지가 간암으로 떠난 기억이 싫었던 안씨였건만 그도 모르는 새 아버지를 닮고 있었다.

“춥고 힘들 땐 자연스레 술을 찾게 되요. 덩달아 담배도 많이 늘죠. 안주라도 잘 챙겨먹어야 하는데 시장 사람들이 어디 비싼 안주를 먹나요? 어떻게 번 돈인데 그 돈으로 안주를 먹나요. 시장 사람들은 검소해서 그냥 소주 한 병이면 족하죠.”

그러나 이젠 ‘세상에서 아빠가 최고’ 라 믿는 두 딸들의 웃음이 안씨의 피로 회복제가 되었다. 그가 두 딸들의 가장이 되는 동안 가락시장도 많이 변했다.

가락동 1세대의 평균 연령이 46세 정도였다면 그들의 뒤를 잇는 2세대들의 평균 연령은 35세 정도로 한층 더 젊어졌다. 또 단일 품목으론 장사가 되지 않아 여러 종류의 품목을 함께 팔기 시작하면서 젊은 상인들 간의 경쟁이 날로 높아져 간다.

ⓒ2004 김진석
“장사가 잘 되고 안 되고가 가장 큰 차이죠!”

안씨는 13년간의 변천사를 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서슴없이 ‘최악의 경기 불황’ 이라 말하는 그는 재래시장이 사라져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안타까워하는 것도 아주 잠시일 뿐 안씨는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느라 달리고 또 달렸다.

“하루만 이 곳에서 일하면 인생을 배울 수 있어요. 나이 많은 어르신부터 젊은이들까지 꼭두새벽에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세상이 달라 보일 걸요. 돈의 값어치를 뼈저리게 느끼죠. 힘들긴 해도 요즘 같은 불황에 바쁘게 일 할 수 있어 어찌 보면 전 행운인 것 같아요.”

돈 쓸 시간이 없어 상대적으로 돈을 빨리 모으게 된다는 안씨. 그는 자신이 직접 번 돈으로 젊은 나이에 남보다 일찍이 번듯한 집도 장만했다. 하지만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안씨는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 자신의 처지가 못내 씁쓸한 모양이다.

“이젠 평일엔 친구들에게 연락이 오질 않아요. 그렇다고 제가 그 친구들이 가족과 함께 쉬어야 할 주말에 그들을 불러 낼 수도 없죠. 서로 생활을 반대로 하기에 망년회 같은 특별한 모임 외에는 만날 수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인간관계가 소홀해 지네요.”

ⓒ2004 김진석
그의 한 쪽 귀에는 언제든 주문을 받을 수 있는 삼색 볼펜이 걸려있다. 손 때 묻은 낡은 장부엔 주문 받은 그 볼펜으로 급하게 휘갈긴 안씨의 글씨가 암호처럼 적혀있다. 그의 손은 물 묻은 나물을 만지느라 마를 틈이 없었고 그의 허리는 핸드폰을 받을 때 아주 잠깐 꼿꼿이 펴지곤 했다.

“하루에 한 끼만 집 밥을 먹어요. 어떤 때는 잠자느라 그것마저도 놓쳐 못 먹을 때가 많죠. 차라리 라면 국물에 찬밥을 말아먹을지언정 집 밥이 더 좋아요. 하루에 두 끼를 밖에서 사먹는 것도 보통 곤욕이 아니죠. 매일 비슷한 메뉴로 조미료 잔뜩 들어간 바깥 음식이 어디 집밥에 비할 수 있나요?”

설 대목을 타는지 갑자기 밀리는 주문에 그는 오늘 새벽 4시경에 먹는 점심(?)밥을 또 건너뛰었다. 몸이 아파도 좀처럼 병원에 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안씨.

그는 낮에 깨어있는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눈 맞추고 싶어 한 꺼번에 긴 잠을 청하지도 못한다. 틈틈이 쪽잠을 청하는 안씨는 아무리 잠을 자도 몸이 개운해 지지 않는다며 언젠가 받게 될 건강 검진이 두렵다고 한다.

“아주 가끔은 넥타이 맨 화이트칼라 직장 생활이 궁금하기도 해요. 하지막 막상 또 그 일을 하면 힘든 건 마찬가지겠죠. 그래도 살아보지 못한 삶 혹은 안 해 본 일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 같은 게 있어요.”

호텔에서 일한 경험이 전부인 그는 태어나서 딱 두 번 넥타이를 맸다. 호텔 면접시험을 볼 때와 결혼 할 때가 그 두 번이다. 쪽잠이 아닌 밤에 깊이 한 번에 잠드는 생활이 안씨라고 왜 부럽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는 자신이 번 귀한 돈으로 지금껏 이룬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후회 하거나 돌아 볼 틈없이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2004 김진석
“큰 애가 초등학교 4학년인데 아직도 산타 할아버지를 믿어요. 그런 꿈을 지켜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적어도 딸들 앞에선 모르는 것 없고, 못 하는 것 없고,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 수 있는 아버지. 적어도 우리 딸들에게만큼은 ‘최고’ 의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안씨의 꿈이자 삶의 의미는 ‘가족’ 이다. 특별히 개인적인 꿈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주 먼 까마득한 얘기이다” 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난 후 그 때 생각해 보겠다는 안씨는 ‘살아가는 일’ 이 ‘현실’ 이라고 말한다.

“주위에 독신 친구들이 있어요. 아주 가끔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자유롭게 사는 걸 보면 솔직히 부러울 때도 있어요. 제가 참 모순이죠.(웃음) 가끔 무언가 다른 일에 도전해 보고 싶어도 당장 제가 일하지 않으면 가족의 생계가 끊겨버리니 무언가를 함부로 시도 할 수가 없어요.”

자신을 모순이 있는 대한민국 남자라고 솔직히 토로한 안씨. 이내 그는 자신의 자랑 세 가지를 첫째부터 세째까지 모두 건강한 ‘가정’ 으로 뽑았다.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서 만큼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어린 시절 고단한 아버지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한 그 슬픔을 알기에 딸들에게만큼은 똑같은 슬픔을 물려주지 않겠노라 다짐한 안씨였다.

ⓒ2004 김진석
행여 딸들과 말이 통하지 않을까 그는 없는 시간을 쪼개 신문 및 티브이 등을 보려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는 않나보다. 잠자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안씨는 좀처럼 마음을 따르지 못하는 몸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에겐 13년 동안 간직해 온 오랜 꿈이 하나 있다. 가족과 느긋한 여행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간 마음 같지 않은 몸 때문에 본의 아니게 가족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염려하는 안씨. 그는 경기가 나아져야 꿈이 실현되지 않겠냐며 경기 활성화를 위해 또 달리기 시작한다. ‘최악’ 의 경기에 나랏님의 관심을 당부하며.

“우리도 이리 쪼들리는데 저희 보다 어려운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경기만 좋아진다면 뭐 특별히 바랄 게 있나요. 힘든 서민들이 잘 살 수 있게 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어요.”

2004/01/21 오전 4:25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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