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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붕어빵 반죽을 젓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2. 2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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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붕어빵 반죽을 젓다
살아간다는 것은 강하고 슬프고 아름답다!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한미숙(maldduk2) 기자   
달력에 4일과 9일이 들어있는 날은 장날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십여분 가다보면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 거의가 그곳에서 내린다. 닷새에 한번씩 장이 서는 대전 유성 오일장이다.

장날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동네 슈퍼나 할인매장의 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지만, 건물 안의 세련된 인테리어 화려한 포장에 담겨진 것과는 달리 장마당의 열린 공간에서 날것 그대로를 보는 맛은 사뭇 다르다.

버스에서 내려 곧장 들어가는 골목으로 서너 걸음 떼다보면, 평소에는 길 한복판이었을 곳에 강아지와 토끼, 고양이, 오리, 닭들이 좁은 철망 안에서 새 주인을 기다린다. 유난스럽게 비비적거리는 중개 한 마리가 밖으로 나오려고 기를 쓰고 있는데, 주인은 바둑강아지를 앞에 놓고 손님과 흥정하고 있는 중이다.

기어이 울 밖으로 뛰쳐나온 중개가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경계선이 없는 걸 눈치 챘는지 갑자기 겅중댄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눈길이 천방지방 뛰어다니는 개한테 쏠린다. 개 주인은 느긋하게, 지가 암만 뛰어봐야 벼룩이지 싶은 표정이더니 흥정을 끝낸 다음에야 앞다리 한 짝을 들어올려 울안으로 집어넣는다.

철망 안에 싸놓은 똥오줌 냄새가 비릿하게 남아있는 길로 철 지난 유행가의 빠른 노랫가락이 메들리로 이어진다. 호박엿 파는 아저씨가 익살스럽게 춤을 추며 지나가는 중이다. 어릴 적, 엿장수가 흔들던 가위소리에 집 안 구석에서 빈병이나 고물을 찾던 기억이 새롭다.

▲ 뻥소리 나기 직전
ⓒ2004 한미숙
내 장바구니는 지갑에 천원짜리 몇 장으로도 뿌듯하다. 당근이나 시금치 상추와 같은 것들이 천원으로 한 보따리가 된다. 여름에는 아기 머리통만 한 애호박 세 개를, 가시오이 대여섯 개를 천원 한 장만 주고 살 수 있는 게 송구할 정도로 값싸고 훌륭한 먹을거리다.

또 한 입 베물면 설탕꿀이 삐져 나오는 기름기 자르르한 호떡은 천원에 네 식구가 한 개씩 돌아간다. 하루 종일 호떡을 굽는 아주머니 얼굴은 불기 앞에서 발그레하다. 불판에 올려진 반죽을 둥근판으로 지그시 누르면 흑설탕이 속에서 좌악 퍼진다.

반죽을 단번에 떼는 속도, 동글납작하게 누르면서 퍼지는 두께, 노릿노릿 적당하게 구워지는 색감. 아주머니의 호떡이 맛있는 건, 내가 만들어내는 호떡 하나에 집중하는 정성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워지자 한데서 푸성귀를 놓고 파는 연세 지긋한 할머니들의 주변이 썰렁하다. 그 분들은 천막으로 둘러친 지붕이나 바람막이가 되는 울타리도 없는 곳에서 맨 땅에 스티로폼을 깔고 앉아 있다.

어디서 물건을 떼 오는지, 아니면 직접 농사지은 것을 갖고 나오는 것인지 언제나 보면 팔 물건도 그리 넉넉지 않아 보인다. 햇빛에 그을린 새카만 얼굴과, 쉬지 않고 마늘을 까거나 도라지 껍질을 벗기고 있는 손은 두꺼비 등가죽 같아서 한눈에도 끊임없이 일하며 살아온 고단한 세월을 짐작케 한다. 무엇이 장날마다 할머니들을 그곳에 있게 하는 것일까.

언제나 줄을 서서 기다리던 치킨 집은 조류독감 파문으로 손님들의 발길이 뚝 떨어졌다. 직접 튀겨주면서 두 마리에 한 마리 값을 받으니 그 근처엔 사람들로 붐벼서 종종 길이 막히곤 했다.

뻥튀기 아저씨는 '뻥기계' 앞에서 보름달로 떨어지는 뻥과자를 포장하느라 손놀림이 분주하다가 가끔씩 손을 놓고 허공을 향해 구름과자를 만들기도 한다.

▲ 뻥!
ⓒ2004 한미숙
어디선가 기막히게 구성진 가락이 울려 퍼지는가 싶으면 키 낮은 리어카 좌판에 수세미나 고무장갑 등을 싣고 다니면서 장마당을 무대로 부부가 나타난다. 앉은뱅이 아저씨가 노래를 부르면 그 옆에서 난쟁이 아줌마가 인사를 하고 물건을 판다. 웬만한 사람은 그들 부부의 물건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장바구니가 채워지고 배가 출출해지자 ‘채울거리’라는 간판 아래 뱃속을 채울 것들이 보였다. 거기는 천원짜리 잔치국수도 있고 오징어튀김, 막걸리와 순대, 어묵 붕어빵도 팔았다. 꼬질꼬질하게 때가 낀 허름한 식탁에 앉아 잔치국수 하나를 시키고 앉아 있자니 아줌마 혼자서 너무 바빴다.

장날마다 딸이 와서 도와준다고 했는데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못 왔다고 했다. 국수 하나 말아놓고 아줌마는 여기저기 부르는 손님들에게 순대도 쓸어주고 붕어빵도 굽느라 정신이 없었다. 붕어빵 반죽을 하는 동안에도 손님들이 아줌마를 불렀다.

“제가 좀 도와 드릴께요!”

기다렸다는 듯, 아줌마는 반색을 했다. 밀가루를 물에 풀어 거품기로 몇 번 시범을 보이더니 붕어빵 반죽을 내게 맡겼다. 그냥 잘 저어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반죽은 보기보다 쉽지 않았다. 아줌마가 할 때는 단번에 잘 풀어지던 밀가루덩어리도 나는 몇 번을 움직였다. 거품기를 저었던 오른팔이 한동안 얼얼했다.

“손님헌티 일을 다 시키고 죄송혀서 워쩌!”

▲ 붕어빵 반죽, 쉽지 않아요!
ⓒ2004 한미숙
잠시 짬이 난 아줌마가 애들 갖다 주라고 붕어빵을 싸주면서 말했다. 싱크대에 수북히 쌓여진 설거지를 뒤로하고 나오는데 막걸리 손님인 듯 아저씨 두 분이 ‘채울거리’로 들어갔다.

상추나 뻥과자, 호떡, 꽁치 한 마리와 붕어빵…, 장마당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지혜를 갖고 있다. 어쩌면 그것들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강하고 슬프고 아름답다!
디지털 말에도 송고합니다.

2004/02/20 오후 5:07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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