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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누추한 일상에서 바라보는 인생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2. 24.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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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누추한 일상에서 바라보는 인생
피천득 선생 수필집 <인연>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규종(satira) 기자   
아주 오래 전 중학생이었던 형의 국어 교과서에 실려있던 피천득 선생의 글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읽었을 때, 선생의 딸 서영을 한 번 만나봤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딸을 바라보는 선생의 따뜻한 시선과 그녀를 아끼는 마음, 그리고 딸과 함께 하는 흐뭇한 시간과 공간이 무척 부러웠던 때문이다.

"다른 사람 없는 방안에서 내 귀에다 귓속말을 하는 서영이 말소리를 좋아한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191-192쪽)

선생의 서책 <인연>은 지나간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추억과 성찰에 기초하고 있다. 길지 않은 문장과 많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선생은 우리의 누추한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선생의 글쓰기에는 '수필'에서 몸소 밝힌 내용들이 그대로 체화되어 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글 하나 하나가 잔잔하지만 깊은 맛을 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는 것이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18-19쪽)

서울에서 태어나고 상해 호강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선생의 이력은 안창호, 이광수, 주요섭, 윤오영 등과 같은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과의 조우와 그들에 대한 소회피력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한다. 이 가운데 춘원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 선생의 서술이 보는 이의 마음을 잡아끈다.

"춘원에 대하여는 정말인 것, 거짓말인 것, 충분히, 많이 너무 많이 글로 씌어지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왔다… 그는 아깝게도 크나큰 과오를 범하였었다. 1937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더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 지금 와서 그런 말은 해서 무엇하리." (149-151쪽)

같이 생활한 시간이나 맺은 인연을 생각할 때 춘원에게 가장 깊은 정을 느끼는 선생으로서는 그가 걸었던 혹은 올발랐던 길 혹은 그릇된 길을 돌이켜보면서 백만 가지 번민이 흉중에 자리하고 있음을 이내 짐작할 수 있다.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춘원을 대하는 선생의 자세는 '친일파 청산'과 연관하여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런데 <수필>에서 내가 가장 눈 여겨 바라보는 대목은 두 여성에 대한 선생의 각별한 마음이다. 선생의 어머니와 딸이다. <수필>은 크게 '종달새', '서영이', '피가지변'의 세 부분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어머니와 딸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째 '서영이' 편에 들어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 눈에 매우 낯익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주요섭의 단편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의 선생이 유치원에서 몰래 빠져 나와 벽장에 숨었다가 깜빡 잠들어 늦은 시각에 엄마 품에 안겨 한없이 우는 장면은 어제 본 것처럼 기억에 삼삼하다.

선생은 나이 들어 '어머니'를 회상할 때에도 반드시 '엄마'로 표기한다. 너무 일찍 선생을 버리고 아버지 곁으로 영영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무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선생의 경우에는 아내와 겹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딸 서영이와 겹친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엄마'에서 선생은 말한다.

"나는 엄마 같은 애인이 갖고 싶었다. 엄마 같은 아내를 얻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서영이가 엄마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간절한 희망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99-100쪽)

선생의 엄마와 같은 여성으로 자라기를 바랐던 그 딸 서영이가 어린 시절부터 유치원을 거쳐 대학생이 된 이후 유학생이 될 때까지의 기록이 '서영이' 편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우리는 선생의 글모음을 바라보면서 현대의 건조하고 삭막한 가족관계를 새삼 반추한다. 이를테면 작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바람난 가족>을 연상해보시라. 그리하여 사회-경제적인 관점으로 자꾸만 환원되는 우울한 인간관계의 심연을 들여다보면서 다시 고개 젓는 것이다.

<인연>에서 영문학자로서 선생이 바라보는 셰익스피어, 찰스 램, 로버트 프루스트는 오늘날의 문학연구에 두드러진 딱딱하고 지나치게 전문적인 사변에서 훌쩍 벗어난 깊은 통찰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문학과 인생이 서로 각자 독립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 관계를 맺으며 조화롭게 상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생은 드러내 보이고 있는 셈이다.

'피가지변'에 서술된 희귀한 '피씨' 성에 대한 유쾌한 설명과 '천득'과 연관된 이름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선생의 작은 바람은 '만년'에 이르면 무소유의 경지를 지향하되, 여전히 인식하고 있는 부족한 내면을 다독거리는 인간의 모습이 약여하다.

"하늘의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해 보기도 한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해본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271쪽)

<수필>에서 선생은 독자들에게 그 어느 것 하나도 강제하지 않으며, 강력한 어조로 주장하거나 훈계하지 않는다. 그냥 잔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선생의 지나온 날들과 사념과 경험을 진솔하게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소박함과 진실함, 부드러움과 넉넉함,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려는 노력, 바로 이런 덕목이 <수필>을 오늘날에도 늙지 않고 살아있는 고전의 반열에 오르도록 하는 미덕이라 생각된다.

2004/02/24 오후 4:17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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