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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봄비가 내리던 그날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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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봄비가 내리던 그날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47>공장일기<30>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이종찬(lsr) 기자   
▲ 1984년 봄 삼천포의 어느 술집에서, 왼쪽이 서창현이다
ⓒ2004 이종찬
비가 오는 봄, 아니 꼭 봄이 아니어도 나는 오래 전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면 모든 것을 팽개치고 방황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비만 오면 정신이 집중되지 않고 몸살이 났다. 나는 그때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혼자 기차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리고 싶은 역에 내려 팔푼이처럼 그냥 떠돌아다녔다.

1984년 봄이었던가. 그날도 조립부에서 한창 작업을 하고 있는 도중에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첫 봄비가.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조립을 할 부품과 화약 조립만 남은 제품을 나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또한 계속되는 야근과 철야근무로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그런 때였다.

조퇴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30분짜리 외출증을 간신히 끊어 공장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나는 그 길로 곧장 창원역으로 가서 순천행 완행열차를 탔다. 차창 밖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들판은 온통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소리로 가득했다. 차창을 열어 제친 나는 오랜만에 촉촉한 흙내음을 맡으며 하릴없이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았다.

'그래. 대자연은 지금 이렇게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나는 공장 안에 갇혀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살고 있다. 또한 공장 일은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닌가.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아니 병역특례를 마치기 위해서 시키는데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불쌍한 인생이 아닌가.'

당시 나는 점점 기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병역특례를 받고 있는 몸이어서 1986년 말까지 그 공장을 그만 둘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공장을 그만 두는 그날이 곧바로 군 입대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기계처럼 일하면서 하릴없이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병역특례제도란 것은 국가기능사 2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방위산업체 근무자가 국방부에서 영장을 받은 그날부터 5년 동안 공장에 근무를 해야 했다. 말이 좋아서 5년이지 영장을 받고 난 뒤부터 5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역특례자들은 공장에서 7~8년을 근무해야만 했다.

또한 1년에 1번씩 가까운 군부대에서 4주 동안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런 사정 때문에 방위산업체에서 일하는 병역특례자들이 받는 불이익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았다. 아마 나의 방랑벽도 그런 불이익에 따른 일종의 반항이었는지도 몰랐다. 내 젊은 날을 송두리째 빼앗기면서도 공장을 그만 두지 못하는 것도 바로 병역특례란 올가미 때문이었다.

"여기는 진주! 진주에서 내리실 손님 안녕히 가십시오."

그런 저런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던 나는 열차 안에서 울려 퍼지는 안내방송 때문에 언뜻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서둘러 진주에서 내렸다.

문득 삼천포, 지금의 사천시에 있는 절친한 친구 서창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고향이 서울이었던 창현이는 내가 다니던 공장에 취직을 했다가 조립부에서 같이 일하게 되면서 첫 인연을 맺었다.

창현이와 내가 일하는 조립부는 통틀어 다섯 명만이 남자였다. 그 중 총각이라고는 창현이와 나밖에 없었으니 그 인기가 하늘을 치솟고도 남을 만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우리 둘은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창현이와 나는 늘상 다른 부서 총각 노동자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친절한 상담역이자 그들에게 짝을 지어주는 충실한 중매쟁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또한 그렇게 둘이서 연인처럼 붙어다니며 술도 마시고 농담도 주고받았으니 미운 정과 고운 정이 얼마나 많이 들었겠는가.

그런 어느날 창현이가 갑자기 공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현장노동자들이 자취를 하고 있는 목동에서 허름한 옷가게를 열더니, 그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지 옷가게를 삼천포로 훌쩍 옮겨버린 것이었다.

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창현이는 어찌어찌하여 군에 가지 않아도 되는 귀하신 몸이었다.

봄비가 내리던 그날 나는 진주역을 뒤로 하고 서둘러 진주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공장과 집에서는 난리법석을 피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당시의 공장규칙은 삼일간 무단결근을 하면 해고대상자에 올렸다.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지.’

'저 비안개가 걷히고 나면 들녘에서 푸르게푸르게 자라나는 채소들의 합창이 시작되겠지. 나 또한 언제까지나 비안개 속에서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비록 비안개 속에서 비에 젖어 떨며 어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서글픈 신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낮이 있으면 밤이 있을 것이다. 또한 늘 낮만 계속되고 늘 밤만 계속되는 그런 일은 없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삼천포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린 나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서둘러 창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들짝 놀란 창현이의 목소리를 기대했던 나는 저어기 실망했다. 전화를 받은 창현이는 우유빛 안개를 머금고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처럼 너무도 차분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카이. 첫 봄비가 오길래 내가 창원으로 올라갈려고 하다가 네 놈이 분명 삼천포에 나타날 것 같아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니 놈이 몸이 근질근질해서 공장 일을 우째 하것노. 술 생각도 간절할 테니까 노산공원 근처로 빨랑 오이라."

그날, 창현이와 나는 세상의 술이란 술은 다 마셔버리고 말 것처럼 밤을 새워 술을 마셨다. 그리고 지난날 공장에서 같이 일하면서 생겼던 우스꽝스러웠던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미래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중매를 했던 현장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 등등 서로가 뒤질세라 마구 떠들었다. 수없이 술잔을 주고받듯이 그렇게.

게다가 창현이와 나는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면 마치 동성연애자라고 손가락질 할 정도로 서로 포옹을 하면서 악을 쓰고 노래를 불러댔다. 마치 이 세상의 노래란 노래는 모두 불러 버리기로 약속한 듯이.

"내일은 삼천포 앞바다에 나가자. 아지메들이 금방 건져낸 해물이 너무 싱싱해서 그 해물을 먹으면 술이 싹 깰끼야."

술집의 유리창이 희부옇게 밝아오도록 술을 마신 그 다음날 점심때쯤 창현이와 나는 삼천포 앞바다로 향했다. 하지만 뿌연 안개 때문에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마치 창현이와 내가 술에 흠뻑 절은 채 찾아오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해미가 바다 대신 허연 머리를 풀고 드러누워 창현이와 나를 한껏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희부연 해미 속에서도 해산물을 건져 올리는 아줌마들이 몇 명 보였다.

둘은 우산도 없이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바위 위에 앉았다. 그리고 싱싱한 횟감을 안주삼아 또다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해미와 함께 우리는 점점 바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술이 바다인지, 바다가 술인지도 모를 정도로.

파도 앞에만 서면 왜들 까부느냐
못생긴 곰치 배창시의 건건이도 못 될
년놈들 뚤뚤 뭉쳐
진실 어쩌구 정의가 어쩌구 입찬 소리 짱알대며.

그냥 그렇게들 생각하라
그냥 시퍼런 목심줄 빳빳이 세운 모가지만
떨구라
그냥 그대로 다음 말씀들만 외우라.

죽어도 못잊을 사랑 떠보내며
다순 피로 마지막 불러주던, 한 곡조
노래라 생각하라.

...

맥없이 희번득 희번득 굴리는 눈도 안 씨리냐
잡것들아 아파하라
저 투창(投槍)!
저 투창들의 주름들.

(천승세 '파도2' 몇 토막)


창현이와 나는 그렇게 사흘 밤낮에 걸쳐 술을 마셨다. 그리고 봄비가 뚝 그치면서 해미가 사라진 그날 저녁 마침내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사흘을 그렇게 보내고 말았으니…. 공장과 집에서 난리가 나 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은 아예 하기 싫었다.

그 일이 일어난 뒤 공장에서는 내게 새로운 규칙을 하나 주었다. 비가 오는 날은 외출금지에다 철야근무를 하라는 그런 규칙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공장 수위에게 퍽이나 많은 술을 사야만 했다. 비가 오는 날은 아예 외출조차 안 되니 어떡하랴. 비가 날 놀리듯이 자꾸만 내리는데 어떡하란 말인가.

당시 나는 봄비가 내릴 때마다 수위에게 잠깐 상가에 다녀온다며 슬그머니 공장을 빠져나와 삼천포로 향하곤 했다. 그런 일들이 자꾸만 반복되자 부서장은 나에게 또 다른 특명을 내렸다.

비가 오는 날은 외출도 좋고, 조퇴도 좋으니 반드시 소재지와 회사 출근 날짜를 보고하고 다니라는 것이었다.

그 지루한 싸움에서 마침내 내가 이긴 것이었다. 게다가 비가 오는 날만큼은 내가 결근을 해도 좋다는 부서장의 특명까지 떨어졌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하지만 하던 짓도 멍석을 펴 놓으면 안 한다고 그 뒤부터는 나에게는 그런 일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찌보면 부서장의 고단수에 내가 진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비가 내리는 날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를 좋아한다. 특히 봄비가 내리는 날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때문에 어지러운 생각들을 정리하기가 참 좋다.

봄비가 내리는 날, 직장에 틀어박혀 멍하니 앉아 있기보다는 목적지가 없는 여행을 통해서 새롭게 피어나는 대자연과 그 대자연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낯선 얼굴들을 만나면 생각이 퍽 깊어지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2004/04/01 오후 2:56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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