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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허기를 참지 못한다. 불혹이 이태 남은 젊은 나이지만 유달리 궁벽한 산간 벽지 마을에서 살아서 젖먹이 시절 못 먹고 자란 탓일까. 불과 20여년 전의 가까운 과거일 뿐인데 배고픈 설움은 이제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때 우리 마을은 세상 물정 모르고 복조리나 만들어 내다 팔고 이모작으로 밀, 보리 농사를 지었지만 꽁보리밥마저 배불리 먹지 못하면서 처절하게 막바지 보릿고개를 넘고 있었다.
'깜밥' 누룽지가 조금이라도 많이 눌게 되면 살림 못한다고 야단을 들었으니 눌은밥으로도 배를 채울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배불뚝이가 되었고 얼굴은 누렇게 떠 부황이 나기도 했다. 급기야 뒷골엔 줄줄이 죽어간 꼬마 귀신을 거적에 둘둘 말아 지게에 져다 묘동도 없이 묻었던 '아장살이'가 즐비했다. 일제 수탈과 한국전쟁 이후 피폐해진 살림에 왜 그리도 아이들을 많이 낳았는지…. 예닐곱이나 되는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어른 할 것 없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가을걷이를 해 봐야 석달을 넘기지 못하고 쌀이 떨어졌고 그러면 시래기죽이나 쌀을 몇 알 넣고 풀죽을 쒀 먹다가 봄이 되면 옆집으로 보리쌀 빌리러 다니던 어머니 모습이 아련하다.
봄에 나는 모든 싹과 꽃은 나물이요, 먹을거리였으니 식물학자 뺨칠 정도로 아이들은 그 분야의 대가가 되어 갔다. 여름엔 앵두, 오둘개(오디), 범(버찌), 때왈(산딸기)을 따먹고 가을로 가면 머루, 다래, 으름, 깨금(개암), 장구밥으로 채우고 고구마, 고욤, 칡뿌리, 초가지붕 위에 올려진 홍시가 긴긴 겨울을 나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겨울 끝자락엔 개밥나무(버들강아지) 열매를 따서 우물우물 껌처럼 씹어댔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오르면 꽃이 먼저 나와 아이를 반가이 맞는다. 개꽃도 아닌 참꽃이 그것인데 몽우리가 활짝 피어 산에 불을 질러 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진달래가 활짝 피면 그 쌉싸름한 연분홍 꽃잎을 따먹었다. 한 입 가득 입에 넣고 설움을 씹는다. 사카린과 물을 섞어 단술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몇 장은 조심히 따서 어머니께 갖다드리면 반 되 남은 찹쌀 가루를 절구에 푹푹 찧어서 화전(花煎)을 이쁘게 부쳐 주었다.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프다고 했다. 하얀 꽃이 피기 전 봄비 한번 맞으면 낭창낭창한 가지나 땅 속에서도 싹이 쏙쏙 솟아올라 한뼘 이상 되는 찔구(찔레 싹)를 선물한다. 잎사귀를 쭉쭉 훑어내고 질겅질겅 씹고, 좀 딱딱하면 껍질을 벗겨 먹으면 상큼한 맛이 입안에 가득했다. 토끼보다 찔레를 더 많이 먹었으리라. 행여 붉은 싹을 멋모르고 먹었다간 소태처럼 쓰디쓴 맛을 감수해야 했다.
꼴 베어 오다 으스스한 묘지를 지나치면 보물 같은 소중한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평소 눈길도 주지 않던 묏동에 관심이 가는 까닭은 '삐비'라는 '띠뿌리' 싹 때문이다. 마침 배가 불러 곧 터질 것 같은 잔디 모가지를 뽑으면 아직 덜 핀 하얀 풀꽃이 나오는데 혀를 보드랍게 만져준다. 잔디 뿌리 띠뿌리도 캐먹고 칡깽이(칡 어린 순) 뜯고 꿀풀이나 인동꽃 암술을 뽑아 벌 대신 달큼한 꿀을 쏙쏙 빨아대고, 감똘개(감 꽃) 실에 꿰어 곶감 빼 먹듯 빼 먹는 재미도 있었다. 메꽃 뿌리나 마를 캐서 구워 먹다 보면 천하태평이요 행복에 젖는다. 여름으로 가는 길에 개구리 뒷다리 무던히도 먹던 그 시절은 영영 오지 않을 텐가. '서리'를 도둑으로 모는 인심에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입이 궁금해지는 건 왜인가. 아이들 손목잡고 들로 산으로 나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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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7 오전 7:28 ⓒ 2004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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