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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미 아줌마'의 봇짐 행상 40여년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8.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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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미 아줌마'의 봇짐 행상 40여년
양말 봇짐 행상으로 불우이웃 도와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권윤영(hooko) 기자   
▲ 헬프 미 아줌마, 신초지씨
ⓒ2004 권윤영

"헬프 미(help me)."

신초지(63)씨는 일명 '헬프 미 아줌마'로 통한다. 행상을 하는 그녀가 봇짐을 메고 들어선 곳에서 외치는 첫마디가 '헬프 미'이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대전 지역의 교육 공무원이나 행정 공무원들 중에는 이 '헬프 미 아줌마'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그녀는 유명인이다.

그녀가 양말 두켤레로 봇짐 행상을 시작한 것은 지난 60년. 꼬박 4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양말 행상을 해 오고 있다. 단지 오랜 세월 동안 행상을 해 왔다는 이유만으로 유명인이 된 건 아니다. 그녀는 행상으로 번 수입의 대부분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고 있다.

"행상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후부터 고아원, 양로원이나 불우 이웃에게 성금을 전달하기 시작했어요. 힘없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으니까 그들과 서로 서로 돕고 사는 것이죠."

▲ 행상 일이 힘들어도 그녀는 웃는다
ⓒ2004 권윤영
그녀가 지금껏 도움을 준 사람들만 5만여명, 액수로는 10억원이 훌쩍 넘는다. 지난 81년 대전경찰서장 표창을 받기 시작해 한국어린이재단 후원장, 대전시장, 충청남도 지사, 대전인권위원회 표창 등을 받았고 국민훈장 석류상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녀가 받은 수많은 표창들은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살아온 헬프 미 아줌마의 지난 세월을 짐작케 한다.

그녀가 양말을 팔기 위해 주로 찾는 곳은 학교나 관공서. 지금은 많은 공무원들이 도움을 주고 있지만 초창기에는 나가라고 소리 지르거나 물건을 팔지 못하게 내쫓기는 모진 일도 많이 겪었다. 수십 년째 봇짐 행상을 하면서 그녀는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인색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행상을 다니는 그녀지만 지난 2002년 7개월간은 그녀가 외치는 "헬프 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자궁경부암 3기 판정을 받고 서울의 병원에서 암 투병 생활을 해 왔던 탓이었다. 방사선 항암 치료 끝에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후 대전으로 내려온 그녀는 또 다시 양손에 봇짐을 들었다.

지금도 매달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고 약물 투여를 하는 고된 생활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픈 몸이라고 호사를 누리는 법은 없다. 2평 남짓한 월세방에서 혼자 생활하는 그녀의 생활비는 단돈 만원일 정도로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그 돈으로 매달 쌀 닷되와 보리 닷되를 사면 그만이다. 반찬값으로 따로 돈을 쓰는 경우는 없다. 학교로 행상을 나갈 때마다 교내 식당에서 얻는 반찬이면 족하기 때문.

▲ 무거운 봇짐을 이고 어디론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2004 권윤영
"행상일이 힘들긴 하지만 살아난 게 감사하지요. 치료비는 당시에 시 공무원들과 학교 선생님들이 성금을 모아주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요즘은 장사가 안 되서 소년 소녀 가장 3명에게만 매달 5만원씩 돕고 있어요. 그 돈도 저한테는 매우 큰 돈이랍니다."

요즘도 그녀는 새벽 6시면 집을 나선다. 특별히 정해진 장소는 없다. 발길이 닿는 대로 대전 지역의 학교를 방문한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7시 50분이면 출근을 끝내기에 그 시간에 맞춰 교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짐을 풀어 놓는다. 무거운 봇짐을 가득 들고도 아줌마는 대부분 두 다리로 걷고 가끔씩만 버스를 이용할 뿐이다.

인터뷰가 있던 그날도 봇짐을 한가득 들고, 한손에 버스표 한장을 집어든 헬프 미 아줌마는 "오늘은 너무 늦었다"며 어디론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행복한 소식만 전하는 인터넷 신문, 해피인(www.happyin.com)에도 실렸습니다.

2004/04/08 오전 8:27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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