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갈수록 삭막해져 가는 버스에서 느낀 온정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13. 09:35

본문

728x90
"엉덩이 반만 걸쳐 앉아 가도 나는 좋구만"
갈수록 삭막해져 가는 버스에서 느낀 온정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한은경(eun80) 기자   
요즘의 버스는 너무도 삭막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좌석버스에서 내릴 때 운전기사에게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요 근래는 아주 드물다.

최근 간혹 몇몇 일반 버스 기사들이 사람들이 탈 때 일일이 인사를 하기도 하지만 그에 반해 반갑게 인사하는 승객은 단 한 명도 못 봤다. 나 역시 아주 이따금씩 들릴락말락 하는 소리로 겨우 대꾸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삭막함이란 주말 저녁 버스 안에서 종종 벌어지는 시비 건에 비하면 양호할지 모른다. 버스 기사와 승객 혹은 술 취한 승객과 그 누군가가 벌이는 싸움은 자칫 삭막함을 넘어 폭행으로 번질까 싶은 두려움마저 들게 한다.

지난 9일 토요일 저녁 종로에서 신촌으로 향하는 131번 버스 안에서의 일이다.

요즘 시내버스에서 볼 수 있는, 두 명씩 앉게 마련된 좌석에 내 피곤한 엉덩이를 쉬게 하던 차, 바로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안 쪽에 앉은 사람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입이 이만큼 나오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한 것이 그냥 봐도 화가 난 듯싶었다. 바깥 쪽에 앉은 사람은 40대로 보이는 덩치있는 아저씨였는데 술이 좀 과한 듯했고, 옆 사람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뭔 일인고 유심히 들어보니 술 취한 아저씨가 생판 모르는 옆 사람에게 '안 쪽으로 좀 더 들어가 앉아라, 전화기 좀 빌리자' 등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계속 귀찮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에 안 쪽에 앉은 사람은 시비조로 대꾸를 좀 하다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하기 시작했다. 술 취한 아저씨는 상대방에게 무시를 당하자 점점 심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한 번 해볼래, 붙어볼까" 하는 식으로 주먹이 오가기 직전의 상황까지 이르렀다.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은 흥미 반 두려움 반으로 그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다행히도 그 상황은 안 쪽에 앉은 사람이 “내 참 더럽다”고 투덜거리면서 버스에서 내려 종결됐다.

버스 안에 홀로 남은 그 아저씨, 누가 봐도 민망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서 있는 사람도 많았지만 누구도 선뜻 그 자리에 앉으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버스 안에서의 싸움은 대부분 여기까지가 끝이기 마련인지라, 나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차창 밖을 다시 응시하려는 순간이었다.

“같이 앉아 갑시다.”

척 보기에도 나이도 좀 있어 뵈고 인상도 좋은 아저씨 한 분이 그 술취한 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하는 것이었다.

“에그, 속이 많이 상하셨구랴. 요새 젊은 사람들이 많이 그러지요. 그래도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지 않것소.”

술 취한 아저씨는 마치 잘 만났다는 듯 다시 목소리를 높여 하소연을 시작했다.

“아니, 왜 내가 이해를 하느냐고! 같이 앉아가는데 자리를 이렇게나 많이 차지하고, 내가 조금만 땡기자니까 무시를 하고…. 사람을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요, 대체? 응?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달래러 온 사람에게 되레 시비조로 말하는 것이 기분 나쁠 법도 하건만, 그 아저씨는 다시 술 취한 아저씨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는 것이었다.

“허허, 내 그 맘 알지. 어디 댁의 잘못이겠수. 그래도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까 조금만 목소리를 낮춥시다.”

술 취한 아저씨는 쉽사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호소했다.

“아니, 이렇게 앉아보라고. 편한가. 내가 이 끝에 간신히 엉덩이만 걸쳐서 앉았다고. 여기 이것 봐요. 안 불편한지.”
“자자, 자리 바꿔서 앉아봅시다…엉덩이 반만 걸쳐 앉아 가도 나는 좋구만 그래. 허허허”

그 아저씨는 손수 자리를 바꿔 앉아가며 술 취한 아저씨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 아저씨 덕에 버스 안의 분위기는 점점 좋아졌다. 내 입가에도 어느덧 미소가 감돌았다.

술 취한 아저씨도 점차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 분과의 대화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요즘에 보기 드물게 온정 있는 그 분 덕에 나와 버스 안의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가 항상 이용하는 대중버스, 점점 삭막해지는 그 공간에서 이와 같은 온정이 사그라들지 않기를 바란다.

2004/04/12 오후 3:19
ⓒ 2004 Ohmynews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