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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번 이상 밥상 차리지만 행복해요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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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번 이상 밥상 차리지만 행복해요"
병든 시댁 식구 '뒷바라지'에 바친 임수강씨의 인생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재경(kjk4131) 기자   
오는 5월 가정의 달 경기도지사 효부상 수상자로 선정된 임수강(47)씨는 경기도 안양시 관양동 골목시장 뒤편 아담한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대문도 없이 활짝 열린 입구에는 농작물을 심었던 화분들이 즐비했다.

"제가 뭘 했다고요. 저도 늙으면 시어머니가 될 것이고, 당연한 것을요…."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임씨와 녹차 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주부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로 유도하자 긴장된 분위기가 다소 호전되는 듯했다.

"우리 며느리 최고"

▲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임수강씨
ⓒ 김재경
그러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용수철처럼 옆방으로 뛰어갔다. 시어머니(노점순·72)의 미세한 소리에도 그의 귀는 활짝 열려 있었다. 시어머니를 얼른 특수 제작된 의자 변기에 앉혔지만, 속바지는 이미 흥건히 젖은 후였다.

내복을 벗기는데 오줌 지린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상체와 달리 노인의 빈약한 다리는 앙상하게 안으로 휘어져 있다.

"할머니, 며느님 좋으세요?" 치매 끼와 우울증으로 말이 없다는 노인은 "우리 며느리 최고, 우리 동네는… 없어요"라고 말한다. 뇌경색으로 가족의 목소리와 사물의 형체만 겨우 식별한다는 노인은 낯선 기자에게 어눌하지만 짧고 분명하게 말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동할 수 없기에 대소변을 가릴 수가 없는 노인이었다. 그렇다고 기저귀를 채우면 두드러기처럼 빨갛게 피부가 부풀어올라 임수강씨는 천을 깔아 용변을 받아내고 있었다. 옷이나 이불을 더럽히는 일이 많아도 싫은 내색 없이 하루에도 서너 차례 세탁기를 돌리는 며느리다.

아직까지는 추워서 시어머니 방은 두툼한 솜이불에 사철 전기장판을 켠다. 시어머니는 식사를 잘 하는 편이라서 대변 양도 엄청 많다고 곁에 있던 시누이가 귀띔했다.

임수강씨는 당뇨로 고생하는 시어머니를 위해 처음에는 운동도 시켜 드리며 열량까지 꼼꼼히 계산해서 식이요법을 했다. 하지만 이런 식단에 익숙하지 않은 시어머니는 "먹고나 죽으련다"고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고 한다.

고심하던 임수강씨는 식이요법으로 시어머니를 노엽게 하기보다는 양을 늘려 드리기로 생각을 바꿨다. 병원에서 처음으로 인슐린 주사를 배울 때는 무섭고 두려웠지만,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시어머니의 양팔과 양다리, 배 순으로 돌아가며 간호사처럼 능숙하게 주사를 놓는다.

결혼, 그리고 시집살이

안양시 부림동에서 상가 경비원으로 일하는 시아버지(이환기·73)는 친정 아버지와 직장 동료였다. 이환기씨는 교양 있는 임수강씨를 첫눈에 며느릿감으로 점찍었다.

이씨는 군대 간 아들이 휴가 나왔을 때 맞선을 주선했고 임씨는 서둘러 약혼을 하게 되었다. 임수강씨는 "부모님이 정해 주었으니 그냥 결혼하는 걸로 알았어요"라고 말한다. 3남 2녀중 장남인 이종태씨가 군대에서 제대한 지 10일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시부모 모시고 시동생, 시누이 뒷바라지하며 맏며느리로 살다가 남편의 직장을 따라 분가했다. 포근한 가정에서 남매의 재롱을 보며 알콩달콩 씨실과 날실로 행복을 짜는 삶은 행복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46세부터 당뇨병으로 고생하던 시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임씨는 11년 전부터 다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 보조기를 찬 시누이와 함께 인터뷰 중인 임수강씨(왼쪽)
ⓒ 김재경
남편 없이 살던 동갑내기 시누이가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충격에 심신이 허약해지자 10년째 한가족처럼 보살폈다. 설상가상으로 시누이는 3년 전 등반 중에 추락, 척추이식수술의 후유증으로 상체에 보조기를 차고 있어 거동조차 불편한 상태다.

임수강씨는 남매와 함께 시누이 아이들까지 도맡아 길러왔기에 외숙모라는 호칭 대신 '원장님'으로 통한다. 그렇다고 임수강씨의 살림이 마음처럼 넉넉한 것은 아니다. 시어머니 병수발과 시누이 가족까지 두 집 살림을 꾸려야 했기에 사과 한 개를 사더라도 요모조모 따져야 한다.

'하늘이 보내 준 천사'

앞집 사는 시누이는 아침에 딸의 부축을 받으며 약봉지 하나 달랑 들고 출근하다시피 친정에 온다. 저녁 먹고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집으로 퇴근하듯 돌아갈 수 있다. 그런 시누이지만 하늘이 보낸 천사 같은 올케가 잘못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집안의 기둥 같은 임수강씨가 5년째 고혈압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아버지를 비롯해 남편, 시누이, 시어머니, 아이들까지 3대와 함께 살기에 임수강씨는 하루에 10번 이상 밥상을 차려야 한다. 인터뷰 도중 부스럭 소리만 들려도 시어머니 방을 들락거리느라 그는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 못했다.

항상 뛰어다니는 아줌마

임수강씨는 때때로 자신의 처지가 슬퍼져서 가끔씩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하지만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신앙에 의지해 최대한 밝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 덕에 지금은 행복하다고.

교회 동료이자, 임씨의 사연을 세상에 알린 박매자(47)씨는 "충효사상이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하는 시대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아서요"라고 제보 동기를 말한다. 주변 사람들은 임수강씨를 항상 뛰어다니는 아줌마로 기억할 뿐,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고.

집 앞이 바로 시장이지만 임수강씨는 병든 시어머니 때문에 달리다시피 30분 내에 후닥닥 물건을 사야 하고, 친정 나들이는 엄두도 못낸다. 그녀가 긴 시간 동안 집을 비울 때는 대학생인 자녀들과 남편이 집에서 쉬는 토요일과 일요일 교회 가는 때가 고작이다.

그녀의 소원은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병석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과 남편이 교회에 함께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에 상을 받게 되면 친정 부모님께 기쁨을 줄 것 같아서 즐거워요." 활짝 웃는 모습이 복사꽃처럼 화사해 보인다.
월간 <우리안양>에도 송고했습니다.

2004/04/12 오후 2:03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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