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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길거리 정' 쌓는 대우할머니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2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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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길거리 정' 쌓는 대우할머니
대구 '대우서적' 박순진 할머니...대형서점 사이에서도 끄떡없어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배선희(jephty) 기자   
▲ <대우서적>의 주인 박순진 할머니(왼쪽)와 10년째 친정처럼 이곳을 찾는 양모씨(오른쪽).
ⓒ2004 평화뉴스

대구 시내 곳곳에 들어선 대형서점들 사이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서점이 하나 있다. 중앙시네마 옆 ‘대우서적’.

서점 주인 박순진(63)씨는 ‘대우할머니’로 불리며 30년 가까이 이 서점을 운영해왔다. 얼핏 특별한 게 없어 보이는 20평 남짓한 작은 서점이지만 이곳 대우서적은 할머니가 그동안 쌓아온 ‘길거리 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점 앞에서 노점상을 운영하는 부부와 야쿠르트 아줌마, 안경점 아저씨 등 동네 상인들에서부터, 몇 년째 단골손님인 젊은 회사원과 주부, 동네 할머니·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대우할머니를 찾는다.

아저씨들과는 야구 이야기도 신나게 하고, 주부들과는 아이들 이야기, 고부갈등의 고민 등 다양한 대화가 오간다. 동네 할아버지의 연애담을 들어주는 것도 모두 대우할머니의 몫이다. 젊은이에게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대구 달서구 송현동에 사는 40대 양모씨는 10년 가까이 대우할머니와 가족처럼 지내는 사이다. 양씨는 속상한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대우할머니를 찾는다.

“할머니는 한마디로 정이 많은 분이세요. 저는 이곳을 친정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할머니에게 와서 직장의 어려움이나 가정의 문제까지도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나면 정말 엄마를 대하는 것처럼 마음이 편해져요.”

친정 같은 대우서적...정성으로 만들어 가는 ‘길거리 정’

대우할머니는 사람들과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길거리 정’이라고 이야기한다. “남편과 자식을 매일 보긴 하지만 이렇게 서점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쌓은 정이 더 소중해요. ‘한 이불 정보다 길거리 정이 더 좋다’는 말도 있잖아”라며 유쾌하게 웃으시는 할머니.

할머니의 ‘길거리 정’은 처음 서점을 찾는 손님들에게도 이어진다. 좋은 책을 스스럼없이 권해주기도 하고, 어떤 책을 잡고 물어도 내용과 감동을 술술 이야기해준다. 초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어도 최소한 서론 정도는 읽어요. 그래야 사람들에게 어떤 책이 좋다고 이야기를 해줄 수 있죠. 나도 모르는 책을 팔 수는 없잖아요.”

할머니와 몇 번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이 할머니 특유의 정감 있는 말투를 느끼고, 한 번, 두 번 서점을 찾다보면 결국 단골이 된다. 양씨처럼 십년 넘게 대우서적을 이용한 사람도 많다.

▲ 대구시내 중앙시네마 옆 대우서적. 대형서점들 사이에서 꿋꿋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4 평화뉴스

할머니는 단골들에게 책값을 깎아주는 것은 물론, 그들의 취향도 관심있게 알아놓는다. 그리고 단골들이 어렵게 책을 구할 필요가 없도록 새로 나온 책을 미리 준비해준다. 몇 년째 ‘노신’과 관련된 책을 찾는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시를 좋아하는 고객도 할머니가 따로 책을 골라 줘 고마워한다.

손님이 찾는 책이 없으면 따로 주문을 해서 이틀 안에 마련해주고, 몇 권이 되든 택배로도 배달해주는 것도 할머니만의 노하우. 서점이 오래 되다보니 간혹 절판돼 구하지 못하는 귀한 책을 이 서점에서 발견하는 사람도 있고, 찾지 못할 경우는 할머니가 수소문해 구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할머니의 노력과 정성이 입소문으로 퍼져 서점을 찾아오는 사람도 꽤 있다.

"대형서점 틈에서 작은 서점 설 곳 없어...작지만 소중한 정으로 일궈갈 것"

할머니는 얼마 전 친하게 지내던 근처 서점이 대형 서점들 틈바구니에서 소리소문 없이 문을 닫았다는 걸 알고 속이 많이 상했다.

“그동안 이 동네도 많이 변했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근처에 10개 가까이 작은 서점이 죽 들어섰는데 이제는 거의 다 사라지고 2개밖에 안 남았어요. 대형서점이 생기고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많이 줄었고, 젊은 사람은 이런 작은 서점에는 거의 오지않죠.”

하지만 복잡한 대형서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우할머니의 서점은 작지만 반갑다. 책 제목만 말해도 어디 있는지 척척 짚어내는 대우할머니. “이렇게 쉽게 책을 구할 수 있는데 그동안 큰 서점에 가서 고생만 했다”며 기뻐하는 손님도 종종 있기에 그 모습을 보면 할머니도 뿌듯하다.

대우할머니의 ‘정’은 서점을 찾은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몰래 꾸준히 소년소녀가장들에게 무료로 책을 보내주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도서관에서 신청한 책은 이윤을 남지 않고 싸게 값을 매겨 배달해준다.

“나는 잘 배우지도 못했고,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비록 작은 서점이지만 이 가게가 있어서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한테는 무엇보다 이곳이 더 소중하고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이 더 정겹습니다.”

혼자 손으로 30년동안 서점을 일궈온 대우할머니.

책을 쥐어주는 할머니의 손길에 이웃과 함께 하는 ‘정’이 묻어난다.
이 기사는 평화뉴스(http://www.pn.or.kr)에도 실렸습니다.

평화뉴스는 <평화와 통일> <나눔과 섬김>그리고 <지역공동체>를 가치로 지난 2004년 2월 28일에 창간한 대구경북지역 인터넷신문입니다.

배선희 기자는 <평화뉴스> 기자입니다.

2004/04/22 오후 4:03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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