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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학교에서 3.1운동에 대해 여러 차례 배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3.1운동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아직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그리 많이 연구되지 않은 주제입니다. 여전히 생소한 이 분야에 대해 일본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이승엽씨가 글을 보내와 소개합니다. 이씨는 지난해 3월 일본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인문학보> 92호에 이 주제에 대한 연구논문을 게재한 바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또다시 3월 1일이 돌아왔다. 식민지 시기 최대의 민족적 저항운동으로서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와 그에 대한
일본 경찰·군대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3.1운동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한국인들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외국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들은 전부 3·1 운동을 다루고 있다(심지어는 문제가 많다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서 만든 역사교과서조차 3·1 운동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3·1 운동이라는 대규모 저항운동의 무대에는 시위를 주도한 조선민중과 이를 탄압한 일본의 군경만이 등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약 34만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약 1700만명이던 조선인의 2% 정도에 지나지 않는 숫자지만, 이들은 주로 예전에 개항장이었던 도시지역에 밀집해 거주하면서 지배민족으로서 조선인 위에 군림하며 각종 이권을 챙기고 있었다. 무단통치체제의 안정 속에서 태평스런 나날을 보내던 이들이 3.1운동이라는 거대한 민족운동의 파도에 직면했을 때 과연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 분야는 그동안 3.1운동 관련 연구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일본인사회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권력 대 민중의 관계만이 아닌, 일본인사회와 조선인사회와의 관계, 통치권력과 일본인사회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일본인들의 대응양상은 거주 지역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일본인 거주자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치안 체제가 미비한 농촌 및 산간 지역의 경우이다. 만세 시위는 전반적으로 평화리에 이루어졌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상당한 폭력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위 군중의 주요 공격대상은 경찰서·주재소·면사무소 등 관청이었지만, 민간 일본인의 주택이나 상점 등도 방화·약탈의 대상이 되는 사례도 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인근 군부대로 피난하거나 주변의 도시부로 도망하고, 심지어는 일본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 덧붙이면, 3.1운동 시기에 수많은 조선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과 대조적으로, 조선인의 공격으로 사망한 일본 민간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일본 경찰의 유탄에 맞아 사망한 일본인 민간인이 한 명 있을 뿐이다. [농촌 중심부] 자경단 결성해 시위 진압... 발포하기도 두번째 경우는, 나중에 읍(邑)이나 부(府)로 재편되는 농촌지역 중심부의 경우다. 농촌지역의 중심부는 조선인의 시위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때로는 격렬한 형태로 전개되기도 한 곳이다. 이러한 대규모의 시위운동이 일어나자 기존의 경찰 및 군대만으로는 진압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상당한 치안 공백 상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이나마 어느 정도 규모가 되던 농촌 중심부의 일본인 사회는 자위단, 자경단을 조직해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게 된다. 각지 일본인 사회에서 자위단의 핵심을 이룬 것은, 평소부터 물리력을 지닌 조직으로서 존재해 왔던 제국재향군인회와 소방조(자치적 성격을 지닌 의용소방대)였다. 이들은 총기 및 도검으로 무장하고 경계활동은 물론 시위 진압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는데, 이 때 시위 군중에게 직접 발포한 경우도 적지 않게 확인된다.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사회의 총기 보유율이 대단히 높았다는 것이다. 1918년말 현재, 엽총·권총·군용총 등을 포함해 민간의 일본인이 보유한 총기의 숫자는 23384정으로 일본인 남성 7.68명당 한 자루, 일본인 4가구당 한 자루 꼴이었다. 이들 일본인 자위단의 활약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한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1919년 4월 말 경기도 의정부 일대에서 대규모의 시위운동이 발생하면서 주변 지역의 시위 군중이 읍내로 쇄도해 소수의 헌병 병력으로는 읍내의 치안을 유지하면서 외부에서 밀려오는 군중을 막아내기에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이 때 읍내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총기 등으로 무장하고 주재소를 경비하며 읍내에 경계를 서면서, 헌병은 외부에서 쇄도하는 군중을 진압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공적인 역할분담이었던 셈이다. [도시지역] 무장한 일본인 날품팔이들 내세워 조선인 린치 세 번째는 주로 예전의 개항장으로서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던 도시 지역 경우다. 도시 지역은 여타 지역에 비해 치안체제가 잘 갖춰져 있었으며 조선 민중의 시위운동도 앞서의 농촌 중심부에 비하면 비교적 온건한 형태로 이뤄진 편이다. 우세한 공권력을 배경으로 일본인 측이 우위를 점하고 있던 이들 지역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민간 일본인의 일방적 공격·린치 행위가 벌어졌다. 당시 경성에 거주하고 있었던 윤치호는 이에 대해 자신의 일기에서 "당국은 갈고리와 곤봉, 칼 등으로 무장한 일본인 날품팔이들을 내세워 '만세' 군중을 공격하는 천박하고 무자비한 방법을 쓰고 있다" "날이 저문 후 조선인이 거리에 나가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 자칫하면 아무런 사전경고도 받지 못한 채 경찰·헌병·일본인 날품팔이들의 칼에 찔리고 곤봉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고 쓰고 있다. 한편, 도시지역은 아니지만 미쯔비시(三菱) 제철소가 건설돼 다수의 일본인 기술자·노동자가 거주하고 있던 황해도 겸이포에서는 지역 기독교회가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고 생각(사실 교회 측은 천도교측에서 제안한 시위운동을 거절했다고 한다)한 일본인 노동자들이 교회를 습격해 기물을 파손하고 사람들을 폭행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인 2명이 체포됐는데 이는 3.1운동 기간에 일본인이 검거된 유일한 사례다. 일본 통치권력의 이중적 시선... "환영하지만 반일감정 자극 우려" 그렇다면 조선을 통치하던 조선총독부나 조선군(조선주둔 일본군)은 이러한 민간 일본인들의 자위단 활동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통치자들의 평가는 이중적이었다. 우선 대규모 시위 운동으로 초래된 치안 공백을 메워준다는 점에서는 환영하는 자세를 취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군·경의 주도로 자위단이 조직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인 자위단의 폭력 행사가 조선인들의 반일감정을 더욱 자극하고 악화시켜 결과적으로는 시위 운동이 한층 더 격화될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운동이 한창이던 3월 11일, 경성부윤(서울시장에 해당되는 공직)이 시내의 일본인 정동총대(지역 자치조직 대표)를 소집해 "내지인(일본인)으로서 불안을 느낀 나머지 경찰관에게 조력하거나 또는 경솔한 행동에 나서거나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훈시를 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 역시 사설에서 일본인들에게 "관헌을 제쳐두고 민간인이 나서 조선인에게 린치적인 제재를 가하는 것은 백해무익한 일로서 삼가야 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요컨대, 통치권력 측에서 볼 때 민간 일본인들은 지배민족의 일원으로서 우군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히려 안정적인 조선통치를 방해하는 면도 있는 껄끄러운 존재였던 셈이다. 식민지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이 자위 차원을 넘어 직접적으로 총기를 사용해 시위 진압에 가담했다는 것, 때로는 그 방약무인함이 정도를 넘어서 통치권력으로서도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는 것, 이는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의 책임이 일본의 국가권력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간의 일본인들에 의한 이른바 '풀뿌리 식민주의'야말로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이 직접적으로 직면하는 일본제국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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