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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의 이른 아침식사를 막 끝낼 무렵 전화벨이 울린다. 원주 집에서 걸려온 전화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언제
기능설정이 됐는지 아내 휴대전화와 원주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 벨 소리는 평소의 것과 다르다. "식사 중이었어요? 얼른 끝내고 제경이 선거 연설문 손 좀 봐줘야겠어요. 시간이 30∼40분 남았으니까? 서두르면 되겠네…." "그 녀석 포기하지 않고 나간대? 반회장 선거에나 나간다고 했다면서. 그러다가 덜컥 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해 보라고 했다면서요. 어쨌든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서둘러 손질 좀 해서 이메일로 보내 줘봐요. 인제 와서 어떻게 할 수 없잖아." 지난 토요일,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작은 아이가 가족들 앞에서 전교 학생회장 출마를 '선언'했다. 이틀만에 농장에서 온 아빠를 보는 둥 마는 둥 시치미를 뚝 떼고 게임에 몰두하던 녀석의 갑작스런 '폭탄' 선언이다. 서울에서 원주로 막 전학 와 아는 친구도 없고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할 텐데…. 녀석의 '뚱딴지' 기질은 정말 알아주어야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선언이었지 일은 이미 저질러 놓은 상태였다.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학급을 대표해 전교 학생회장에 출마할 희망자를 묻자 덜컥 손을 들어 후보로 낙점을 받았다고 한다. 또 아파트 이웃 동에 살아 안면을 익힌 같은 학년 친구 녀석을 앞세워 40명으로부터 추천서까지 받아 놓았다. 이름과 학년, 반, 그리고 서명이 들어 있는 추천서를 자세히 살펴보니 절반 정도는 같은 반 아이들, 나머지는 다른 반 아이들로부터 받은 추천서였다. 이미 6학년 각 반을 돌며 선거운동도 제법 진행했다는 의미다. '그놈, 아빠를 닮아서 제법이야. 배짱도 있고 적극적이란 말이야. 흠….' "나 전교회장 출마할래" 폭탄 선언한 아들 순간 아득한 옛날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전교생이 100명을 약간 넘는 조그만 시골 초등학교(지금은 아예 폐교되었지만) 6학년이 된 나는 몇몇 친구들의 지지를 받아 전교 어린이회장 선거에 나섰다. 민주주의를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당시 교장 선생님의 소신에 따라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투표로 어린이회장을 선출하게 된 것이다. 경쟁 후보는 1학년 때부터 줄곧 우등생이었던 홍형기라는 친구였다. 학업성적에서는 비교가 안 됐지만 이상하게도 당시 담임 선생님은 나를 적극 후원하는 눈치였다. 선거운동 요령과 전략 등을 슬쩍슬쩍 귀띔해 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결혼을 앞두고 집에서 신부수업을 하던 큰 누님이 선거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포스터를 손수 도화지에 여러 장 그려 학교 곳곳에 붙이도록 했는데, 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내 지지자들이 오가는 학생들에게 '한 표'를 부탁하는 등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선거 열기가 조성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드디어 선거일, 후보자 연설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없고 막상 투표를 할 때는 상대후보를 찍었던 것으로 기억된다(후보자도 투표를 했음).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상대후보 또한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고 나를 찍었다고 하니, 순수했던 동심이 지금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개표 결과 나는 전교 어린이회장에 뽑혔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두 표 차이로 이긴 것 같다. 상대후보를 은근히 후원했던 어떤 선생님이 개표 결과를 보며 낙선한 친구에게 "아, 이 녀석아. 네 이름에 투표했으면 이길 수도 있었잖아"하며 아쉬워했던 것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어이, 회장. 아버지한테 송아지 한 마리 잡으라고 말씀드려." 그 날, 얼떨떨해 하고 있는 내게 어떤 선생님이 농담처럼 던진 말에 나는 무척 부담을 느꼈다. 그러고는 방과 후 아버지에게 몇 번을 벼르다 겨우 말을 꺼냈다. 너무 진지한 표정, 그리고 그 비싼 송아지를 잡도록 해야 한다는 죄송함이 가득 찬 내 얼굴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리시던 아버지를 나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 송아지를 잡지는 않았지만 교장 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들을 초청한 막걸리 파티가 우리 집에서 열렸다. 없는 형편에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모아 음식을 장만하신 어머니, 그리고 선생님들과 연방 막걸릿잔을 주고받으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던 아버지의 오래 전 모습이 아른거린다. 전교 회장에 당선돼 잔치 벌인 어린 시절 추억 "그런데 제경아빠, 전교 회장이 되면 학교에 필요한 자재 같은 것도 기증해야 하고 전체 선생님들과 학부모들 식사비만도 어마어마하다던데, 괜찮겠어요? 보통 수백만 원은 일도 아니래요." 잠시 오래 전 추억으로 행복감에 젖어 있던 내게 아내의 이 한 마디는 큰 충격을 주며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아니, 아이가 학생회장 하는데 왜? 그럴 리가 있겠느냐며 괜한 것으로 아이의 도전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내 말에 아내는 세상물정을 그렇게도 모르느냐는 듯한 표정이다. 아내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아마 이곳에 오래 산 이웃에게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는 모양이다. 길게 이어지는 통화 내내 표정이 심각하다. "거 봐요. 이 엄마가 아는 어떤 집도 아이가 회장이 됐는데, 학교에 축구 골대 기증하고 선생님 전원, 그리고 학년별 반별 회장 엄마들 모두 식사대접 하는데 연간 칠팔 백만 원은 우습게 썼다나 봐요." 통화를 끝낸 아내 표정이 굳어져 있다. 그냥 학급회장에나 출마하라고 설득하겠다고 한다. 학급회장도 전혀 인사할 곳이 없지는 않지만 부담은 훨씬 적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 학교와 부모들의 이 순수하지 않은 관행들로 인해 아이의 꿈을 뭉개버릴 수 있단 말인가. 기부, 식사대접 등 수백만 원 써야 한다는 현실에 놀라다 그날, 아내는 아들 녀석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말을 돌려가며 은근히 설득을 한 모양이다. 전교회장 선거는 포기하고 반회장 선거에만 나가는 것으로 어느 정도 동의가 됐다고 한다. 내가 따로 아들 녀석을 불러 조용히 물어보았다. "전교 학생회장은 왜 하겠다고 마음먹었니?" "음, 일단 학생 중에 최고의 자리이고, 내가 서울에서 전학을 왔으니까 이곳 친구들과 서울 친구들이 서로 사귀면서 뭐 온라인 게임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명료한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내 질문에 대한 정답도 딱히 나오기는 어려운 것이어서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녀석의 회장이 되고자 하는 굳은 의지는 확인할 수 있다. 아내의 눈짓을 짐짓 외면하며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한 번 해 봐. 선거 전략도 잘 세우고 네가 전교생들에게 할 말도 미리 정리해서 당선하도록 열심히 뛰어 봐. 알았지, 아들!." 오늘이 선거일인지는 아내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아들 녀석의 산만한 연설문을 고쳐서 메일로 보낸 후 아내와의 통화에서 아직도 아내는 혹시 있을 수도 있는 몇 퍼센트의 회장당선을 걱정하고 있는 눈치다. 나 또한 현실의 벽을 과감히 허물 자신이 없다. 아들 녀석의 당선을 고대해야 하나, 상처나 받지 않을 정도로 낙선하길 바라야 하나, 이 어이없는 고민을 어떻게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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