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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그 수필에서 저자는 서정적이고 섬세한 필체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슬픈' 일들을 잔잔히 적고 있다. 울음 우는 아이들, 정원 한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쏟아지는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볕, 아무도 살지 않는 옛 궁성의 헐은 벽과 문설주의 삭은 나무 위에 쓰인 판독하기 어려운 문자, 동물원에 잡힌 호랑이의 불안과 초조, 포수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사슴의 눈초리. 숱한 세월이 흐른 뒤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그 편지에는 이렇게 써있다고 하던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너의 소행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가져오게 했는가." 중학생인 딸의 방을 청소하다가 문득 안톤 슈낙을 떠올렸던 것은 딸이 써놓은 '갖고 싶은 것들~♬' 50가지를 훑어볼 때였다. 딸은 A4 이면지에 뭔가를 긁적여 놓았다. 아무렇게나 쓴 걸로 봐서는 공부를 하다가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적은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1번부터 50번까지 가지런하게 번호가 매겨진 걸로 봐서는 평소에 많이 생각해 두었던 것을 적어놓은 듯도 했다. '내가 갖고 싶은 것' 중에서 금메달인 1번을 차지한 것은 '홈시어터'였다. 가족들도 모르게 친구들과 어울려 은근히 영화를 많이 본 부르주아(?)답게 딸은 홈시어터를 1번에 두었다. 은메달인 2번은 꿈도 야무진 '오피스텔 한 칸'이었다. 엄마의 잔소리나 동생과의 다툼 때문에 기분이 상했을 딸이 독립된 공간을 원하고 있었다. 질풍노도의 그 시기엔 나 역시 '화려한 독립'을 꿈꾸었던 터라 딸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갖고 싶은 것 3번과 4번은 '노트북 컴퓨터'와 '성능 좋은 디카'였다. 하나 같이 죄다 비싼 것들뿐이어서 걱정이 되었다. 물론 희망사항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 밖에도 돈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었다. '캠코더, MP3, CD 플레이어, 그랜드 피아노, 쌍안경, 폴라로이드 카메라, 필름 카메라, 공기 청정기, 개인용 가습기, 진공관 앰프의 오디오 시스템' 아, 읽어보기만 하는 데도 내 등골이 휠 것 같다. 하긴 이미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린 어른들의 속성이 어디 청소년들이라고 고고하게 비켜가겠는가. 갖고 싶은 목록 중엔 나도 잘 모르는 브랜드와 물건도 있었다. '롤란드의 신디사이저'와 '102mm 흰색 코스모스 천체망원경' 그리고 '별지시기' 어디 이뿐인가. 외모에 관심이 많은 사춘기답게 옷과 신발도 빠지지 않았다. '7부 청바지'와 '남색 남방' '흰색 7부 면바지' '남색 트렌치코트'와 '회색 정장' (자기가 무슨 숙녀라고). 발에 맞는 '샌들'과 '화이트 골드 목걸이' (나도 갖지 못한 것들이다.) 소녀의 꿈은 계속된다. 하긴 50가지나 되니 이것 저것 안 들어가는 게 없다. 이번엔 귀여운 소녀다운 물건들이다. '메모 박스. 예쁜 강아지. 빨간 우체통과 DVD. CD. 콘서트 VTR' 이 밖에도 '마리모 패밀리' '그 남자 그 여자' 책. '2100알+끼리(이게 뭔가?)' '캔들 세트'와 '예쁜 일기장' '샤프와 LP판' '미국행 티켓'과 '워십 콘서트 티켓' 눈길을 끄는 허황된 것들도 있다. 바로 31번의 '언니'와 42번의 '무제한 신용카드'가 바로 그것들이다(어이구, 정말 겁이 나는군!). 그런데 딸이 갖고 싶어하는 것 중에는 이런 물질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흐뭇하게 나를 미소짓게 했던 게 있었으니 바로 23번과 39번, 40번이었다. 23. 만점 짜리 성적표 39. 예쁘게 나온 사진 40. 그 사진으로 만든 학생증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책상에 앉아 쓸데없는(?) 공상을 한 딸이 솔직히 밉지만은 않았다.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면서 하나 둘 적어나갈 때 이 소녀는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하긴, 나 역시 내가 갖고 싶었던 마란츠나 JBL 브랜드의 스테레오 그림을 벽에 붙여두고 뿌듯해하지 않았던가. 딸이 긁적여놓은 '갖고 싶은 것' 역시 그런 희망의 목록일 것이다. 나는 오십 개나 되는 딸의 희망 목록 중에서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했다. 바로 34번에 적힌 '1만5000원 문화 상품권'이었다. 방학을 앞두고 신이 나 있는 딸이 어제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엄마가 네게 문화상품권을 사주기로 했어. 만 오천 원 어치!" "…" 어리둥절한 표정의 딸이 다음 말을 기다린다. "아까 청소하다가 네가 적은 거 봤거든. 죄다 '야무진' 꿈들이라 엄마 능력 밖이더구나. 그래서 제일 만만한 34번을 해주기로 했어." 그때서야 비로소 사태(?)를 파악한 딸이 목록을 가져다 보더니 활짝 웃으며 한마디 한다. "그럼 0을 하나 더 붙여서 15만원 문화상품권이라고 적을 걸 그랬네." | ||||||||||||
2004/07/16 오전 11:38 ⓒ 2004 Ohmynew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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