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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산 것을 키워내는 짱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7. 1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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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산 것을 키워내는 짱
[북한강 이야기]내 마음의 짱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윤희경(yhgg12) 기자   
사전을 들추다 그럴듯한 짱을 하나 만났다. 울짱이었다. 우지(울보) 짱인가 해서 한참이나 다시 보았으나, 엉뚱하게도 울타리란 뜻이었다. 요새 젊은이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짱의 원조가 울짱에서 시작되었나 싶어 한참이나 웃었다.

해마다 여름이 오기 전에 울타리를 세운다. 울타리 감으론 갈참나무가 좋다. 아장구(나무 가지의 강원도 사투리)가 많지 않아 바람이 잘 통하고 껍질이 꺼실하여 어린 덩굴손들이 기어올라가기가 수월해서다. 사람 키보다 좀더 자란 고만고만한 것들만 골라잡는다. 언제나 그렇듯 생나무를 베려면 송구스러워 목을 다섯 번쯤 굽실거린다.

지렛대로 땅 속을 쿵쿵 찔러 구멍을 뚫고 겹으로 꼽아 놓는다. 울 섶 꽂기가 끝나면 칡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 매준다. 잘록한 허리는 어디서 봐도 좋은 법인데 울타리의 옴폭한 부분은 늘씬한 여인의 허리 결을 보듯 시원해서 좋다. 울타리를 나누려고 겅둥겅둥 발자국 뛰기를 해 본다. 스물 한 발자국이나 되었다.

▲ 울타리섶
ⓒ2004 윤희경
울밑을 삼등분해서 호박과 오이 줄 강낭콩을 묻었다. 어린 것들이 고개를 내밀고 세상 구경을 나온다. 보고 보아도 귀엽고 앙증스럽다. 대롱에 살이 오르고 본 잎이 둬 서너 장 벌어지면 덩굴손이 울타리를 타기 시작한다. 울타리는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덩굴손들을 좋아한다. 한 쪽만을 고집, 왼쪽으로 시작했으면 왼쪽 감기, 바른 쪽으로 출발했다면 죽어도 바른 쪽이다.

이쪽 저쪽을 휘둘러 볼 법도 하건만, 흔들림 없는 양심을 앞세우고 위로만 기어오른다. 어쩌나 보려고 바른쪽 감기를 왼쪽으로 슬쩍 옮겨 놓아도 비웃기나 하듯 어느새 바른쪽으로 되돌아온다. 울타린 오늘도 자신의 몸을 비썩 말려가며 서 있어도 외롭지 않다. 어린 손들의 올곧은 마음 씀씀이에 비하면 죽어도 한이 없을 듯싶고, 오직 튼실한 버팀목이 되리라 하늘을 올려다본다.

▲ 호박 덩굴손
ⓒ2004 윤희경
정원과 텃밭을 둘러볼 때마다 죽은 것들이 산 것들을 많이도 길러내고 있음에 깜짝 놀란다. 정원수, 고추, 토마토, 가지, 꽃 모두 지주 대나 버팀목 신세를 지고 있다.

▲ 토마토와 지주대
ⓒ2004 윤희경
뿐이랴. 사람 인(人)자를 대하면 더욱 재미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단단히 버티고 서 있다. 서로 의지하며 양쪽에서 버티고 있을 땐 아늑하고 든든하다. 그러나 한 쪽만 빼버리면 금방 쓰러질 것 같아 위험하기 짝이 없다. 한 번 쓰러지면 혼자는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고, 한 쪽이 달아나면 어쩌나하고 괜한 걱정을 하기도 한다.

며칠 전, 버팀목처럼 사는 친구를 따라 중증 장애인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친구, 복지원에 도착하자마자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우물대더니 예쁜 돼지저금통을 꺼내놓았다. 저금통을 닮아 통통한 얼굴을 한 자원봉사 아가씨께서 통장을 건네 주며 입금 내역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친구와 수십 년 간을 사귀어오면서도 저리 부끄러워하며 꽃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 제비동자와 지주대
ⓒ2004 윤희경
죽어서도 자기의 소임을 다하고 하얗게 말라 기운이 느슨해진 울타리 섶, 지주 대 버팀목들, 한결같이 서로 지탱하고 바쳐주는 사람 인(人)자를 대할 때마다 부끄럼이 앞선다. 그리고 내 안에 버려진 보잘 것 없는 것들을 헤아리고 되돌아본다. 산 것이 산 것을 키워내기도 힘들고 어려운 법인데 죽은 것이 산 것을 키워내며 말없이 제자리에 서있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대견스럽기 때문이다.

▲ 오이와 대롱
ⓒ2004 윤희경
어제 저녁엔 이가 쑤시고 저려 한 잠도 못 잤다. 두번째 어금닐 빼내며 이젠 누구를 바쳐주는 버팀목은커녕, 자신의 잇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딱한 꼴을 하고 있다가 퍼뜩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나도 짱이 되려면 호랑나비처럼 예쁜 저금통을 새로 하나 마련해야 되겠다고….

▲ 큰나리와 호랑나비
ⓒ2004 윤희경
윤희경 기자는 북한강 상류에서 솔바우농원을 경영하며 글을 쓰는 농부입니다. 꽃과 나무와 새, 호수, 그리운 고향이 담겨 있는 에세이집 '북한강 이야기'를 지난 4월에 펴낸 바 있습니다.

2004/07/16 오전 11:16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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