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길들여짐에 대한 책임감
/박종국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는 프랑스가 패전하고 나서 셍 떽쥐뻬리가 미국에 건너가 있던 1943년 4월에 씌어졌고, 그곳에서 발표되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저자 자신이 헌사에서 밝혔듯이 레옹 베르뜨라는 어른에게 바쳐진 어른을 위한 동화입니다. 그래서 실상 이 작품 속에 담겨져 있는 깊은 사색과 의미와 진실은 사뭇 이해하기 힘듭니다. 특히 이 작품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는 것은 어린 왕자라는 연약하고 순결한 어린이의 눈을 통하여 잊혀지고 등한시되었던 진실들이 하나하나 일깨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구렁이의 그림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과,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전체에 흐르는 주조사상입니다. '인간의 대지'를 비롯하여 쎙 떽쥐뻬리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사상은 언제나 책임감과 의무감,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가 넘치는 휴머니즘입니다. '어린 왕자'에서도 이런 사상이 쉽고도 부드러운 표현이 작품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린 왕자의 별에는 세 개의 화산과 한 송이의 장미꽃이 있었다. 아름다우나 교만한 꽃이 부려대는 투정 때문에 어린 왕자는 쓸쓸하고 불행하게 느껴져 어느 날 자기별을 떠나서 다른 별들을 방문하게 된다. 일곱 번째 별은 바로 우리가 사는 지구였다.
어린 왕자는 우연히 아름다운 장미가 하나 가득 피어 있는 정원을 보게 된다. 그 꽃들은 자기의 별에 두고 온 그 교만스러운 꽃과 아주 닮아 보이는 꽃들이었다. 어린 왕자는 갑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자기는 지금까지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가진 부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는 그와 닮은 꽃이 수없이 많이 피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만 풀밭에 엎드려 울고 말았다.
어린 왕자는 지혜로운 한 마리의 여우를 만나게 된다.
너무 쓸쓸한 탓으로 친구가 되자고 제의했으나 여우는 길이 들지 않아서 친구가 될 수 없노라고 말했다. "길들인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묻자 그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설명해 준다.
“넌 아직 나에게는 수많은 꼬마 애들과 똑같은 꼬마에 불과해. 그리고 나는 네가 필요하지도 않고 너 또한 내가 필요하지 않아. 나는 네게 있어 그 많은 여우들과 똑같은 여우에 지나지 않거든. 그러나 만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게 되는 거야. 나에게는 네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네게는 내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야."
여우는 친구를 파는 상인은 없으니까 네가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자기를 길들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우는 말이란 오해의 원천이 되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매일같이 자기를 그저 보러 오라고만 주의시켰다. 말이 앞서는 우정보다는 마음과 마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우정의 방식을 여우는 택했던 것이다. 길들인 것에 대하여 소중함을 깨닫게 된 어린 왕자는 정원에 핀 그 수많은 꽃들이 자기의 장미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장미들은 자기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여우와 작별 인사를 할 때, 여우는 선물로 비밀을 하나 가르쳐 준다.
"아주 간단한 거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
그리고 이런 말도 해주었다.
"네 장미가 네게 그다지도 소중한 것은 그 장미를 위하여 잃어버린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잊고 있어. 그러나 너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돼. 언제나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해.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는 거야."
“내가 길들였기 때문에, 그래서 나의 것이기 때문에 그가 세상에 오직 한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이고, 그를 위하여 마음을 쏟는 귀중한 시간들 때문에 그가 더없이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되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숱한 사람들 속에서 한 사람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왕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만큼 누구나 한번쯤은 마음에 두고 읽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길들여진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가 쉽고도 부드러운 어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게 쎙 떽쥐뻬리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사상이자 휴머니즘입니다. 서로 좋아한다는 것은 결국 길들여진 것에 대해 소중함을 깨닫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가늘고 긴 대롱으로 보는 하늘은 좁은 동그라미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얘기하더라도 스스로 자기 성을 쌓는 사람은 대롱을 걷어내고 보는 하늘의 그 무한함을 볼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에 곶감이 달다고 하여 어느 한쪽만을 부여잡고 사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을 좁힐 뿐입니다.
현대를 ‘유목민의 시대(time of nomads)'라고 하는 것은 단지 빠르게 변하는 세상살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유목민이 되기 위해서는 소유하려는 집착을 버려야합니다. 마음을 열고 집착을 버리고 기꺼이 제 영역을 포기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삶과 사랑은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지난 세월동안 쌓아올린 자신의 성이 아깝기도 하겠지만,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을 때 더 나은 사랑이 찾아들고, 더 넓은 세상이 보입니다. 결코 서두르거나 지나쳐서 좋은 게 없습니다. 직선의 길보다 곡선이 아름다운 것은 느려서가 아니라 그 넉넉한 포용력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익숙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각 때문인 것입니다.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 한평생을 살면서 서로에게 지독히 길들여졌다면 그만큼 서로에게 심리적인 부담이나 물리적인 부담이 적다는 뜻입니다. 물론 편안함과 두려움, 혹은 설렘의 무게는 똑같지만 우리는 상대방에게 익숙해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나이 들면 보수화된다는 말이 있듯이 요즘은 애써 사랑하는 일 하나에도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습성이 더 견고해진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젊었을 때는 그토록 진보적이고 개방적이었던 내가, 지천명의 나잇살을 가진 지금 많이 유연해졌습니다. 그 까닭을 일일이 드러낼 필요는 없겠지만, 그전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주어진 삶에 대해 고민하며, 조그만 일 하나에도 자기반성을 먼저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간단없는 시행착오와 뭔가를 이뤄내고 소유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였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오히려 느긋하고 여유롭습니다. 길들여짐에 대한 책임감을 알 듯 새로운 희망을 얘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빛소리> 2010년 2월호(통권 제164권)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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