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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대만 잡으면 야누스가 된다?

박종국에세이/박종국칼럼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1. 6. 1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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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대만 잡으면 야누스가 된다?


박종국(교사, 수필가)


야누스(Janus), 로마신화에 나오는 문(門)의 수호신, 그리스신화에 대응하는 신이 없는 유일한 로마신화의 신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문에 앞뒤가 없다고 생각하여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겼으며, 미술 작품에서는 4개의 얼굴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야누스는 집이나 도시의 출입구 등 주로 문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였는데, 문은 시작을 나타내는 데서 모든 사물과 계절의 시초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영어에서 1월을 뜻하는 재뉴어리(January)는 ‘야누스의 달’을 뜻하는 라틴어 야누아리우스(Januarius)에서 유래한 것이다.


야누스는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울 때부터 숭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모든 종교의식에서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먼저 제물을 받았다. 로마 중심부에 있던 신전의 문은 평화로울 때는 닫혀 있고 전쟁 중에는 열려 있었는데, 누마와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릴 때에는 단 한 번만 닫혀 있었다고 한다. 로물루스에게 여자들을 빼앗긴 사비니인들이 로마를 공격하였을 때 뜨거운 샘물을 뿜어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한다. 두 얼굴을 지닌 모습에 빗대어 이중적인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토성의 여섯 번째 위성의 명칭으로도 쓰인다.


인터넷 검색창을 두들겼더니 야누스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짠하게 훑어져 나왔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기에 두 얼굴을 지닌 모습에 빗대어 이중적인 성향을 가졌거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어쨌거나 ‘야누스’란 어휘에서 풍겨나는 의미는 그렇게 시원찮다. 뭔가 뒤를 딱지 않은 것처럼 개운하지 않다. 누군가 나를 두고 야누스라면 그 말을 듣는 순간 켕겨드는 낭패감을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야누스적인 성향이 두드러질 때가 있다. 운전을 할 때다. 평소에는 처연하다가도 막상 차를 몰고 거리에 나서면 가차 없이 두 얼굴을 가진다. 그저 앞서가는 차를 그냥 두지 못하고 냅다 달린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내 차를 추월할 때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 과속을 넘어 쾌속 질주한다. 때문에 속도위반 범칙금 딱지를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나뿐만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성인남자라면 칠팔십 퍼센트는 운전대만 잡으면 팔딱댄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길을 두고도 앞서가는 차를 가만두지 못한다.


평소 흉허물 없이 지내는 친구가 그랬다. 얼마 전에 세상을 하직할 뻔했다고. 뭔 일이냐고 물었더니 차를 폐차시켜야할 만큼 대형교통사고가 났었는데 천형으로 몸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났단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고 했다. 설마, 자기는 절대로 사고를 내지 않는다는 의뭉한 확신이 생사를 가늠할 만한 사고를 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이제 차를 몰지 않는다고 했다(그는 자전거나 버스를 타고 다닌다). 딴은 자라에게 놀란 놈이 솥뚜껑 보고 놀란 셈이다.


그렇다. 어떤 일에 한번 놀란 사람은, 그와 비슷한 상황만 보아도 겁에 질린다. 예전에 그는 카레이스에 버금가는 속도광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버스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더욱이 다행스러운 것은 창원시가 전국 지자체로서는 처음으로 소속 공무원들에게 자전거 출퇴근을 권장하고 있는 터이다). 그의 결심은 굳다. 나 역시 그동안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겪었다. 차를 몰면서 사고를 안 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때마다 차는 조금 망가졌을망정 몸은 멀쩡했기에 사고 순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고 다시 차를 몰았다.


어제 친구가 황당한 교통사고를 냈다. 상대편 차가 냅다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얼떨결에 사고를 당한 친구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난 뒤였다. 아무리 자신의 입장을 견지해 보려고 해도 보험사와 경찰의 사고수습 정도는 그저 열압 돋우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문제 사단을 상방과실로 따졌던 것이다. 대개의 교통사고가 그렇다. 절대적인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일단 차바퀴가 움직였다하면 최소한 2 대 8은 각오해야한다. 정지해 있던 상태에서 부딪혀도 소용없다. 왜 차가 그곳에 있었냐는 책임을 방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억울해 하며 분개해도 교통사고에 대한 법리해석은 객관성을 늘 담보하고 있다는 데는 할 말 없으리라.


나는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냅다 달린다. 불과 왕복 오십 여 킬로미터의 거리일 뿐인데도. 무엇에 그렇게 바삐 쫓겨 사는지 운전대만 잡으면 도무지 여유가 없다. 대부분의 차들도 같은 대열에 합류하는 것 같다. 자연 야누스가 아니 될 수 없다. 그저 방방거리며 달려야 직성이 풀린다. 이 글을 쓰면서도 벌써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런 나를 두고 아내나 아이들은 기회 닿을 때마다 안전 운행하라고 다그친다. 근데도 그게 잘 안 된다. 가늠컨대 지금 나의 운전 에티켓 지수는 얼마쯤 미칠까. 2011.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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