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했던 작가와 한 소녀의 사랑
-에드가 앨런 포와 버지니아 클렘
세계문학사를 보면 불행한 생애를 살다 간 사람이 많다. 비극적인 태생, 불우한 성장기, 사회의 질시, 가난, 지병, 정치적 망명, 사랑의 실패, 부당한 평가, 이른 죽음`….
하지만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에드가 앨런 포(1809 ~1849)의 불행은 그 모든 비극의 총화 같다. 아마 포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았던 작가는 드물거다. 그의 생애 행복은 어린 사촌 여동생 버지니아 클렘과의 결혼, 그리고 그녀와의 11년 동안의 결혼 생활이 전부였다.
포는 미국의 젊은 법학도와 미국으로 공연하러 온 영국 여배우 사이에서 태어났다. 법학도는 연애에 빠져 공부를 포기하고 무대에 나섰으나, 자기 길이 아니기에 행방을 감추었다 객사하고, 여배우는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며 흥행을 계속하지만, 얼마 못 가 병으로 죽는다. 포가 겨우 두 살 때였다. 비극의 전주곡은 이렇게 두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스코틀랜드계 상인이 후견인으로 나선 덕분에 포는 영국에 건너가 초등교육을 받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해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하지만, 부모를 일찍 여읜 상처와 어린 날의 객지생활은 그를 도박과 음주벽에 빠지게 해 큰 빚을 지게 된다. 후견인이 크게 실망하여 그 빚을 갚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학비까지 끊어 버리자 포는 방랑 길에 나선다. 생활고를 해결할 수 없어 군에 입대, 2년째 복무하던 포를 돈으로 빼내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집어넣은 후견인은 또다시 크게 실망한다. 1주일 동안 모든 훈련과 수업에 빠져 사관학교에서도 제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포를 도와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글은 이때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물에 빠져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다. 저승사자의 목소리와도 같이 음울한 그의 소설은 어두운 성장기와 무관하지 않다.
조금씩 이름을 얻어 가던 무렵인 1836년, 포는 보통 사람의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결혼을 한다. 13세의 사촌 여동생 버지니아 클렘과의 정식 결혼으로 말미암아 포는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장모이자 숙모인 클렘 부인에게 포는 <나의 어머니에게>라는 시를 바쳐 위로한다. 가난한 사위가 장모에게 바치는 선물이라곤 시밖에 없었다.
어린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 속에서 포는 <어셔가의 몰락>,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검은 고양이>, <황금충> 등 추리소설의 원조격인 소설과 포의 이름을 영원히 빛낼 명시 <갈가마귀> 등을 연이어 발표한다. 남편이 글을 쓰게끔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던 아내 클렘은 1847년 1월, 폐결핵이 악화되어 피를 토하고 죽는다.
극한적인 가난이 꽃다운 나이 스물네 살의 그녀를 하늘나라로 데려갔다. 포에게 이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답고 청순한' 여인이었던 아내는, 포에게 시적 영감을 불어넣어 <헬렌에게>, <애너벨 리>, <리지아>, <애니를 위하여> 등 감동적인 서정시를 쓰게 했으나, 서른여덟 나이의 포를 남겨 두고 사라져 버렸으니….
이때부터 포는 완전히 자포자기하여 술과 아편에 의지해 살아간다. 아니, 죽어 간다. 리치먼드에 사는 어린 시절의 친구이자 자산가의 미망인이 된 여인과 약혼을 하고는 1849년 10월, 결혼식 준비 관계로 고향 볼티모어로 가면서 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먼저 저승으로 간 아내 클렘이 재혼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을까. 고향 마을 어느 부인의 생일 파티에서 축배를 든 뒤 술을 마시기 시작해 인사불성이 된 포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두고 만다. 아내가 죽은 지 정확히 2년 9개월 만이었다. 포와 클렘, 저승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을까. 포의 애절한 연시를 '울림'과 '떨림' 없이 읽을 수밖에 없다.
달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 그래서 나는 밤이 지새도록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 /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 <애너벨 리> 중에서
필자 : 이승하님 시인
출처 : 월간《좋은생각》 2001년 0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