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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빠 되기

박종국에세이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7. 7. 2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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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빠 되기

 

박 종 국

 

누구나 어렸을 때는 '나도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나?'하는 생각을 한다. 아이 눈에 비친 어른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한다. 그렇지만, 아이는 그렇지 못하다. 또 경제적인 힘도 없을 뿐더러 어른들의 간섭이 만만찮다.

 

그러나 막상 어른이 되면 어렸을 때가 좋았다고들 말한다. 대부분의 어른은 현실적으로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아이는 무한한 가능성과 꿈을 가졌다. 어린 시절 어른이 되면 아이한테 잘 해주리라 생각했으나,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그게 얼마나 막연한 꿈이었던지 다시 어린이로 돌아가고 싶다.

 

특히, 어린 시절 행복한 기억이 많을수록 그에 해바라기를 한다. 하지만 나같이 유년시절 아린 상처가 또렷하다면 지금 어른으로 만족한다. 치유되지 않는 핵심감정은 결코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삶의 상처로 남는다.

 

지난 30년 동안 6학년 담임을 하면서 숱한 아이들을 만났다. 그 중 유독 한 아이, 그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외할머니와 살았다. 아니, 돌배기 때 당한 일이라 부모부재에 대한 아픈 기억은 없다. 그보다 외할머니와 이모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여느 아이보다 해밝게 자랐다.

 

그런 그가 우연한 기회에 부모님의 비애를 듣고는 쉼 없이 흔들렸다. 6학년 막 사춘기 문턱을 밟았을 때였다. 그때 나 역시 총각선생으로 그를 만났으니 우리는 동변상련 하듯 죽이 맞았다. 며칠씩 쏘다니다가 퀭한 얼굴로 교실에 나타났을 때 녀석 배고프다는 얘기만 연발했다.

 

그때 그 시절 전기나 가스로 음식을 장만할 때가 아니었다. 석유곤로에다 새까맣게 그을린 냄비 하나, 김치 한 보시기, 장아찌 한 접시면 밥 한 공기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딱 비웠다. 한데는 나는 그보다 라면 끓이기를 더 자주 했다. 요즘이야 라면 종류가 2백여 가지에 이를 만큼 다양하지만, 그때는 삼양라면 하나뿐이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는데도 나는 넌지시 세 봉지 분량을 끓였다. 녀석이 눈치코치를 보지 않고 폭풍흡입하게 하려면 곁에서 같이 먹는 시늉을 떨어야 했다. 그렇게 녀석의 연사흘 주린 배를 채우고 나면 첫째시간 교과서를 펼쳐들기도 전에 책상 엎어져 잤다. 아예 널브러져 잔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겠다.

 

그렇게 녀석과는 한 해 동안 별 부딪침 없이 지냈다. 그리고 나는 학교 만기가 되어 울산으로 새 부임지를 찾아 떠났다. 그게 녀석과 20년 세월을 후딱 지나치게 한 사연이었다. 그 사이 우리는 단 한 번도 연락하거나 만난 적도 없었다. 풍문으로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남해를 거쳐 창원에 입성했을 때 우연찮게 선술집 포장마차에서 어엿하게 성인이 된 그를 만났다. 우린 누가 먼저라기보다 단박에 서로를 알아차렸다. 그는 서른 초반의 신세대젊은이, 나는 마흔 후반의 동네 아저씨였다. 뭐랄까,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들이 남다른 음색으로 서로를 감지하듯 우리는 서툰 젓가락질로 알아차렸다. 우린 지독한 왼손잡이였다.

 

그날 우리는 까만 밤 하얗게 지새도록 얘기꽃을 피웠다. 그의 넉넉한 성장이 너무 고마웠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해도 우리는 자리를 파할 수 없었다. 마치 양파껍질 벗기듯이 자잘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순서 없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용케도 그는 사춘기적 고뇌를 말끔히 잊고 심신 건장한 청년으로 어엿하게 성장했다는 거다(이후 그 숱한 얘기들은 애써 똬리를 틀어둔다).

 

지금까지 이 땅에 선생으로 살면서 보람찬 일이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제자들의 올바른 성장을 지켜보는 일이다. 마땅히 그 성장이라면 어른으로서 제 역할을 다함이다. 확신하건대 옛 6학년 담임을 만나 선술집에서 막소주 한 잔으로 감사하다 얘기하는 젊은이라면 그는 바로 내 성공작품이다.

 

꼭두새벽 서산에 걸린 초승달을 보며 그가 말했다.

 

선생님, 그때 그 바다 기억하나요? 지독히 추웠던 그날, 절벽에서 뛰어내린 저를 선생님이 건져주셨지요? 차가운 겨울바닷바람에 발발 떨었지만, 전요, 하나도 안 추웠어요. 지금처럼 선생님이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었으니까요. 전 항상 먼발치에서 선생님 소식을 전해 듣고 살았어요. 그러면서 결심 하나했어요. 적어도 박종국 선생님께는 못난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그래서 이빨 앙다물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선생님

 

그는 지금, 불혹의 아빠다. 여태껏 부모의 사랑의 목말랐던 그가, 세 아이 아빠로, 여우같은 아내랑 정답게 산다. 그의 전화를 받으면 언제나 목젖이 아리다. 요새 그는 입만 뻥긋하면 좋은 아빠로 살고 싶단다.


박종국에세이칼럼 2017-40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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