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녀의 감동편지
스물아홉 살 총각인 나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날도 평소처럼 집 앞 횡단보도를 걷는데, 그만 시속 80km로 달리는 차를 못보고 부딪쳐 중상을 입었다.
난 응급실에 실려 갔고, 기적적으로 생명은 건졌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왔지만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시력을 잃었다.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절망했고, 결국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기면서 그녀를 만났다. 아홉 살 밖에 안 되는 소녀였다.
“아저씨. 아저씨 여긴 왜 왔어?”
“야! 꼬마야! 아저씨 귀찮으니까 저리 가서 놀아.”
“아, 아저씨. 왜 그렇게 눈에 붕대를 감았어? 꼭 미라 같다.”
“야! 이 꼬마가. 정말. 너 저리 가서 안 놀래.”
소녀와 나는 같은 301호를 쓰는 환자였다.
“아저씨, 근데. 아저씨 화내지 마. 여기 아픈 사람 많아. 아저씨만 아픈 거 아니잖아요. 그러지 말고 나랑 친구해. 네? 알았죠?”
“꼬마야. 아저씨 혼자 좀 내버려 둘래?”
“그래, 아저씨. 난 정혜야. 오정혜! 여긴 친구가 없어서 심심해. 아저씨 나보고 귀찮다고?”
그러면서 소녀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음 날이었다.
“"아저씨, 그런데 아저씬 왜 이렇게 한숨만 푹푹 셔.”
“정혜라고 했니? 너도 하루아침에 세상이 어두워졌다고 생각해봐라. 생각만 해도 무섭지? 그래서 아저씬 너무 무서워서 이렇게 숨을 크게 내쉬는 거란다.”
“근데, 울 엄마가 그랬어. 병도 예쁜 맘먹으면 낫는데. 내가 환자라고 생각하면 환자지만, 환자라고 생각 안 하면 환자가 아니라고. 며칠 전에 그 침대 쓰던 언니가 하늘나라에 갔어. 엄마는 그 언니는 착한 아이라서 하늘에 별이 된다고 했어. 별이 되어서 어두운 밤에도 사람들을 무섭지 않게 환하게 해준다고.”
“음, 그래. 넌 무슨 병 때문에 왔는데?”
“그건 비밀.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곧 나을 거라고 했어. 이젠 한 달 뒤면 더 이상 병원 올 필요 없다고.”
“그래? 다행이구나.”
“아저씨, 그러니까 한 달 뒤면 나 보고 싶어도 못 보니까 이렇게 한숨만 쉬지 말고 나랑 놀아줘. 응, 아저씨!”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소녀의 한마디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마치 밝은 태양이 음지를 비추듯 말이다.
그 후로 난 소녀와 단짝친구가 되었다.
“자! 정혜야 주사 맞을 시간이다. 언니, 그 주사 30분만 있다가 맞으면 안 돼. 잉~, 나, 지금 주사 안 맞을 거야!”
“그럼 아저씨랑 친구 못하지. 주사를 맞아야 빨리 커서 아저씨랑 결혼한단다.”
“칫!”
그리고 소녀는 엉덩이를 들이대었다.
그렇다. 어느 새 소녀와 나는 병원에서 소문난 커플이 되었다.
소녀는 나의 눈이 되어 저녁마다 산책을 했고, 아홉 살 꼬마아이가 쓴다고 믿기에는 놀라운 어휘로 주위 사람, 풍경 얘기 등을 들려주었다.
“근데 정혜는 꿈이 뭐야?”
“음, 나 아저씨랑 결혼하는 거.”
“에이, 정혜는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 응, 그렇게 잘 생겼어?”
“음, 그러고 보니까 아저씨 되게 못생겼다. 꼭 괴물 같아.”
그러나 소녀와의 헤어짐은 빨리 찾아 왔다.
2주후, 나는 병원에서 퇴원했다.
소녀는 울면서 말했다.
“아저씨, 나 퇴원 할 때 되면 꼭 와야 돼 알겠지? 응, 약속!”
“그래, 약속.”
우는 소녀를 볼 수는 없었지만, 가녀린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다.
그리고 2주일이 지났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최호섭씨?"
“예. 제가 최호섭입니다“
“축하합니다! 안구 기증이 들어 왔어요."
“진, 진짜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일주일 후, 난 이식수술을 받고, 3일 후에는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세상을 보게 되었다.
난 너무도 감사한 나머지 병원에 감사편지를 썼다. 기증자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랬었는데 난 그만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구기증자는 다름 아닌 정혜였다.
나중에 알았던 사실이지만 바로 내가 퇴원하고 일주일 뒤가 정혜의 수술하는 날이었다.
소녀는 백혈병 말기환자였다고 했다. 난 소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소녀가 건강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나는 소녀 부모님을 만났다.
“우리 아이가 많이 좋아했어요.“
“예.....”
“아이가 수술하는 날 많이 찾았는데....”
정혜의 어머니는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정혜가 자기가 저 세상에 가면 꼭 눈을 아저씨 주고 싶다고. 그리고 꼭 이 편지 아저씨에게 전해 달라고.”
그 또박또박 적은 편지에는 아홉 살 글씨로 이렇게 쓰였다.
아저씨!
나 정혜야. 음, 이제 저기 수술실에 들어간다.
옛날에 옆 침대 언니도 거기에서 하늘로 갔는데...
나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저씨 내가 만일 하늘나라로 가면 나 아저씨 눈 할 게. 그래서 영원히 아저씨랑 같이 살게.
아저씨랑 결혼은 못하니까.
어느덧 내 눈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와락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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