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끝자락에 서서
박 종 국
한해 끝자락에서 그동안의 일을 추슬러 본다. 숱한 일 줄줄이 이어진다. 좋은 일을 기억해내기는 그리 힘들지 않다. 그냥 썩 내비치기만 해도 기분 좋아진다. 그 속에서 나를 에워싸고 도는 사람도 환하게 웃는다. 사랑 가득한 모습이다. 한해를 좋게 마무리 한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러나 어쭙잖은 일을 떠올릴 때면 낯짝이 뜨거워진다. 왜 그랬을까. 조금만 내 욕심을 덜어내었더라면 적어도 남을 덜 힘들게 했을 텐데. 왜 자꾸만 네 탓만 외치고, 네 덕이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꼽아보니 스스로의 잘잘못을 가려내지 못하고 낯붉혔던 때가 많았다. 이순(耳順)의 나잇살을 가졌어도 여전히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 입 좁은 그릇이다. 너그럽지 못했다.
요즘 누구나 꽉 채우려 한다. 집을 마련해도 스물 서른 평은 성에 차지 않는다. 차를 사도 중형차다. 그래야 그 넓은 공간에 채울 여력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너무나 허튼 데 집착하는 세상이 됐다. 뜨악하게 큼지막한 절집은 부담스럽다. 엄청나게 높이 세운 교회의 첨탑도 마찬가지다. 꼭 그래야만 하늘의 뜻에 다다른다는 듯이. 아무튼 그것마저도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나만을 위한 욕심이 아닐까. 그렇잖아도 지금의 한국교회나 산문(山門)이 돈벌이에 눈 먼 파렴치라는 좋잖은 평(評)을 들은 지 오래다.
산행에 나섰다가 인적 드문 산중에 조그만 암자를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조심스레 암자에 들리면 스님이 나서서 반갑게 맞아준다. 마주 한 스님의 얼굴이 참 맑다. 이어 차를 내온다. 팍팍한 산행에 피곤 마련했던 일행은 차를 받자마자 벌컥 마셔버린다. 그런데 노스님의 찻잔은 찻물이 채 1/3도 안 담겼다. 우리는 철철 넘치도록 부어 마시고도 두어 잔을 더 마신 참이다. 스님은 갈증을 해갈한 우리를 넌지시 바라보면 차는 가득 부어 마시는 게 아니라 빈 잔의 여유를 갖고 마셔야한다고 일갈(一喝)하셨다.
한 해 동안의 일을 되짚어보니 여유 없이 살았다. 차를 몰면서도 조금만 늦춰가거나 끼어들기를 할 때면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냅다 방방 댔다. 급히 갈 길도 아니었으면서 괜스레 빠듯한 마음만 애달았다.
3분의 여유를 가지면 모든 일이 쉽게 풀려난다. 아무리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이라도 여유를 갖고 시작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급하다고 바늘 허리에 매여 쓰지 못한다. 그런데도 요즘 세상은 본의 아니게도 재차 서두르게 만든다. 전국에 걸쳐 쭉쭉 뻗은 도로가 그 주범이다. 이제 어디를 가든 일정 이상의 속도를 요구한다. 도로 사정이 좋다는 게 그만큼 속도광을 부추긴다.
먹을거리 하나도 속도전에 돌입한 세태다. 수많은 즉석식품매장이나 길거리 패스트 푸드 점을 보면 가히 ‘빨리빨리’를 지향하는 사회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국밥설렁탕 한 그릇을 놓고 느긋하게 밥 먹는 사람이 드물다. 그냥 밥 말아서 훌훌 넘겨버린다. 우리네 식성은 자장면 한 그릇 먹는데 불과 3분이 안 걸린다. 똑같은 면 종류지만 파스타나 스파게티를 먹을 때는 얼마나 여유를 부리며 돌돌 말아 먹는가.
계묘년(검은 토끼해) 한 해도 이제 달력 한 장 남겨두었다. 세밑 끝마무리에 충실할 때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려면 여유를 가져야겠다. 알뜰하게 챙긴다고 아등바등대기보다 수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얽히고 설 켰던 일을 하나하나 여유를 두고 챙겨보아야겠다. 더러 좀 엉성한 굶이 보여도 좋게 여며야겠다. 무엇 하나도 내 삶의 흔적이 아닌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11월 '미틈달(눈마중달)' 건강하게 보냈다는 데 만족한다. 내일이면 12월 '매듭달(마음을 가다듬는 한 해 끄트머리 달이다. 온마음으로 맞을 일이다.
|박종국 에세이칼럼니스트
그저 베푸는 사랑 (1) | 2023.12.11 |
---|---|
말빚 (2) | 2023.12.06 |
때로 냉정함이 필요하다 (1) | 2023.11.30 |
추풍과이(秋風過耳) (0) | 2023.11.28 |
화 다스리기 (1) | 2023.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