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르포-소록도]상처 서로 보듬어안고 살아가는 한센인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5. 5. 4. 00:34

본문

728x90
수려한 풍광만 남고, 아픈 과거 잊혀지나
[르포-소록도] 상처 서로 보듬어안고 살아가는 한센인들
  김덕련(pedagogy) 기자
▲ 소록도 병원에 현재 입원중인 환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 할머니도 당뇨병 등 노인성 질환으로 고생하다 최근 병원에 들어왔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 곳을 특별한 곳으로 바라보지 말아 주세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하고 노환이 있는 분들이 대부분일 뿐 양성 한센병 환자는 거의 없어요."

소록도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국립 소록도 병원 원생 자치회 관계자와 자원 봉사자 등도 소록도에 거주하는 700여명의 한센병력자 중 양성 환자는 20명 정도라며 이같은 지적에 동의했다. 양성 환자 비율이 극히 낮은 이런 현상은 소록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2000년 기준으로 전국의 등록 한센인 1만8260명 중 양성은 535명에 불과했다.

소록도 한센인들의 평균 연령은 75세에 가깝다. 소록도 한센인들 중에서는 수십 년 간 섬에서만 생활한 경우도 있지만 젊은 시절 뭍으로 나갔다가 나이 들어 몸이 안 좋아지면서 돌아온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 소록도 한센인들은 장애수당 지급을 요청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자치회 사무실을 찾았을 때 김명호 원생 자치회장은 "다른 정착촌과 달리 국립병원인 이곳에서는 장애수당이 지급되지 않아 지난 1월 방문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이 부분을 청원했다"며 "이에 필요한 서류 작업을 하느라 자치회가 요즘 바쁘다"고 소개했다.

김 회장은 "나라에서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고 연령대에 따라 최고 월 5만원 정도의 노인 수당이 나오긴 하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덧붙였다.

생활의 중심축은 종교... 비합리적 차별이 불러온 절대자?

소록도에서는 자원봉사와 물품 지원 등으로 도와주는 종교 기관과 일제 시대 겪은 피해 보상 청구 소송을 지원하는 변호사들(특히 일본)을 거의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종교는 주민 생활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를 믿는 상당수의 주민들은 병사(病舍) 지대에 있는 5곳의 교회에 매일 새벽 4시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천주교(성당 1곳) 신자들도 오전 8시에 모여 미사를 드린다.

이는 종교 기관이 이들에게 먼저 찾아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과 함께 한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차별을 받아온 주민들에게 합리의 차원을 넘어 존재하는 절대자가 필수적이었던 데서 비롯된 것인 듯했다.

▲ 소록도 주민들에게 신앙은 절대적인 듯 했다. 매일 새벽4시 마을별로 있는 교회에 모여 새벽기도하는 것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소록도는 직원 지대(1번지)와 환자 및 병력자들이 거주하는 병사(病舍) 지대(2번지)로 구분돼 있다. 과거에는 이 구분선이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처럼 강하게 주민들의 생활을 틀지었지만 최근에는 그렇지 않다. 물품이 들어오는 통로인 선착장 자체가 별개로 존재(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문을 즈음해 통합)하고 병사 지대에서 직원 지대로 함부로 이동할 수 없는 등 과거에 존재했던 명시적인 구분과 차별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병사 지대 거주자들도 "예전에는 직원들이 원생들을 위에서 통제했지만 이젠 그런 관계가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소록도 중앙공원에서 만난 70대의 한센인 B씨는 "60년대 초처럼 원생이 수천 명 되던 때는 마을마다 각각 기술자가 있어 시설에 문제가 생기면 자체적으로 수리했다"고 과거를 떠올린 뒤 "그러나 사람도 적고 워낙 노령화된 요즘에는 그런 문제가 생길 경우 직원들이 해결해 준다"며 달라진 관계의 일면을 설명했다.

소록도는 인근 녹동항에서 배로 5분도 채 안 걸린다. 섬 모양이 '작은 사슴'(小鹿)을 닮았다고 해서 소록도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섬에서 역설적으로 사슴은 골치덩어리다. 예전에 산에 풀어놓은 사슴들이 최근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슴이 농경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높이가 1m가 넘는 철조망을 친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을 보는 관광객, 가려지는 과거

육지와 가까운 데다 경관이 수려하기 때문에 소록도를 찾는 관광객도 많다.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가 엄격하게 구분돼 병사 지대에 들어갈 수 있는 외래인은 환자를 면회하러 온 사람 뿐이던 과거와 달리, 7~8년 전부터는 병사 지대가 일부 개방된 상태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병사 지대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엔 못 들어가지만 소록도 병원을 지나 중앙공원 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다.

▲ 소록도 병사지대 일부가 최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면서 소록도를 방문하는 이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러나 상당수 관광객들의 관심사는 가위손의 솜씨를 빌린 듯 잘 정돈된 조경과 수려한 풍광인 듯했다. 이들은 깔끔하게 정리된 '오늘'에만 초점을 맞출 뿐 오늘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오늘과 공존하는 소록도의 '과거'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였다.

중앙공원에 있는 소록도 역사 및 한센병 자료 전시관과 검시실, 감금실에서 만난 관광객들 중에는 전시관에 있는 소록도 역사에 참여했던 한센인 중 이 섬에 여전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이도 있었다. 대개 이 섬에서 과거에 한센인이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지만 그 속사정을 궁금해하는 이는 많지 않아보였다.

공원에서 만난 50대 한센인 A씨는 "이 곳을 찾는 관광객 중 일제 때 입은 강제노역 피해 보상 청구 소송을 지지하는 서명에 동참한 사람은 반도 안 된다"며 "한센인들이 이 섬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모른 채 겉모습만 훑어보려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소록도에서 오랫동안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김영민씨는 고통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지적했다. "관광객들 중 '돈을 줄 테니 좋은 피부병 약을 달라'고 하는 분도 종종 있다"고 소개한 김씨는 한센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라고 말한다.

평행선 달리는 두 역사의 합류 조건은 상처 보듬어 안기

▲ 한센균이 시신경에 침투해 시력을 잃었다는 이 할아버지는 어릴적 한센병력이 있었을 뿐 여느 시각장애인과 다를 바 없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어 김씨는 "자원봉사자나 병원 직원들 중에서도 이 문제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며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이럴진대 관광객만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지적했다. "자원봉사하러 오기 전에 소록도의 아픈 역사를 먼저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일주일 이내의 짧은 기간 동안 자원봉사하기 위해 섬을 찾은 청년 뿐 아니라 수년간 소록도에서 근무한 몇몇 직원들에게서 "소록도의 역사를 잘 모른다"는 말을 들으며 김씨의 우려 섞인 지적이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 한 직원은 "오랫동안 이 곳에 살았지만 소록도 주민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고 말했다. "노환을 앓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 한센인을 위해 성심껏 일하고 있다"는 그의 의식 속에서도 고통 어린 소록도의 역사는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소록도에는 과거의 고통을 몸과 마음으로 모두 느끼며 살아가는 한센인들의 역사 뿐 아니라 그 옆에서 함께 흐르지만 합류하지는 않는 다른 이들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었다.

5월 1일 오전 자치회 건물 휴게실에서 열린 '일제 강제노역 피해보상 청구소송 경과 보고' 자리에 참여한 이들은 인상적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대만 변호사들과 함께 소록도를 찾은 낙생원의 한센인 란씨와 그 자리에 모인 40여명의 소록도 한센인들이 서로를 껴안는 모습이었다.

상처를 보듬어 안고 고통의 경험을 나누는 모습은 소록도의 그 어떤 풍광보다도 아름다웠다. 주변만을 맴돌고 있는 소록도의 두 역사가 합류하는 날, 나아가 소록도 한센인들의 역사와 섬 바깥의 역사가 행복하게 만나기 위한 전제조건은 고통을 직시하고 나누는 것임을 그들은 말없이 외치고 있었다.

▲ 대만 변호사들과 함께 소록도를 찾은 낙생원의 한센인 란씨(왼쪽)가 소록도 한센인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2005 오마이뉴스 남소연

2005/05/02 오후 8:28
ⓒ 2005 Ohmynews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