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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사진으로 본 연등축제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5. 5. 11.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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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연등축제
연등축제는 오래된 민족전통문화
  진홍(sbrscool) 기자
▲ 온 누리에 자비가
ⓒ2005 진홍
'염화미소' 또는 '염화시중'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온 말입니다.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으나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으나 가섭만은 참뜻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고 하여 '이심전심'의 묘법이라고 합니다.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중생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세상! 바로 불국정토이겠지요?

▲ 오색 물결로 수놓은 연등행렬
ⓒ2005 진홍
연등축제는 신라 때부터 행해져 온 오래된 우리의 전통문화입니다. 고려 때는 2대 명절로 정착되었으며, 특히 풍년과 안녕을 기원했던 민간행사인 연등회는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에도 성행하였답니다. 한국문화 속에 불교가 뿌리내린 건 그 역사만큼이나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동자승들도 연등을 들고
ⓒ2005 진홍
파르라니 깎은 동자승들에게도 번뇌가 있을까요? 그저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게만 보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모습 아닐까요?

▲ 동남아불교도들의 행진
ⓒ2005 진홍
올해는 동남아 등에서 불교도들이 대거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나눔과 자비가 펼쳐졌으면 합니다.

▲ 조계사 앞길에서 펼쳐진 체험마당엔 서양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꼬마 연등 만들기에 열중하는 외국인
ⓒ2005 진홍

▲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아느뇨?
ⓒ2005 진홍
한 손가락은 하늘을, 또 한손은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 온 누리가 다 괴로움에 빠져 있으니 내가 이를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삼계에서 고통스러움에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구원해 주려는 대발심, 대자비가 있어야 한답니다.

▲ 불교국가인 티벳 스님들의 불교음악 연주회도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2005 진홍

▲ '불화삼매경' 불교미술 체험에 열중인 서양 어린이.
ⓒ2005 진홍

▲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온 가족이 구경온 것 같네요.
ⓒ2005 진홍

▲ 도룡뇽의 숨소리가 들리나요? 지율스님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도룡뇽 친구들.
ⓒ2005 진홍

2005/05/09 오후 1:55
ⓒ 2005 Ohmynews

 

 

가난한 여인 난타의 등이 가장 밝았네
부처님 오신 날 앞둔 아차산 영화사 풍경
  정상혁(prjana) 기자
부처님 오신 날이 10여일 후로 다가왔습니다.

비록 자신의 종교가 '불교'라고 선뜻 이야기하지 못하는 분도 초파일에 누군가와 함께(대개는 어머니나 할머니) 가까운 절에서 담백한 산채 비빔밥 한 그릇 먹은 기억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날 둘러본 절은 공간이라는 공간에는 모두 빽빽하게 등이 걸려있었습니다.

불교의 오래된 이야기 중에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위국(슈라바스티) 기원정사에 머무실 때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여인 난타가 자신이 하루 종일 구걸한 돈으로 기름을 사서 밝힌 등이 어느 누구의 등보다도 오래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 등을 밝히는 이유도 그러한 지극한 정성으로 그 분이 오신 길을 밝히고 또 스스로를 밝히는 빛을 삼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휴일을 이용해 광진구에 위치한 아차산 영화사에 들러봤습니다.

▲ 영화사 대웅전에도 초파일을 알리는 걸개가 걸렸습니다.
ⓒ2005 정상혁
일주문을 들어서니 갖가지 색의 등이 온 도량을 뒤덮은 것이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 형형색색 등이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2005 정상혁
대웅전을 뒤로 하고 내려다 본 등이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아래에서 바라본 모습 역시 장관입니다.

▲ 줄줄이 이어진 등이 꼭 용의 몸통 같기도 합니다.
ⓒ2005 정상혁
등은 어두움을 밝히는 것이고 어두운 곳에 걸릴수록 그 가치는 더 높아질 것입니다. 산으로 향하는 이 길은 밤이면 굉장히 어둡겠죠? 그 어두움을 내가 켠 등 하나가 밝혀준다면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 큰 공덕이 있을까요?

▲ 저라면 이곳에 제 등을 걸고 싶습니다.
ⓒ2005 정상혁
형형색색의 등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마치 저 계단의 끝에는 깨달음의 세계가 있지 않을까요?

▲ 저 계단의 끝에는...
ⓒ2005 정상혁
저 꼬리표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들입니다. 그 소망은 마치 가난한 여인 난타의 등처럼 오래오래 꺼지지 않고 타오를 것입니다.

▲ 초파일이면 자기 가족의 등을 찾느라 분주하겠지요?
ⓒ2005 정상혁
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지만 여전히 나란히 걸려 있는 등은 아름답습니다.

▲ 등 아래에 가시면 하늘을 올려다 보세요.
ⓒ2005 정상혁
조계종 전 총무원장이자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월주 스님의 성지순례 사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 이곳 영화사에는 부처님 성지 사진전도 열리고 있습니다.
ⓒ2005 정상혁
이번 초파일에는 종교와 상관없이 가까운 절에 들리셔서 담백한 산채비빔밥도 한 그릇 드시고 연등도 구경해 보는 것 어떨까요?
5월 8일에는 부처님 오신 날 연등축제가 펼쳐집니다. 직접 참가해도 좋고 길거리에 서서 그냥 구경만 하고 있어도 흥겹습니다.

연등축제 홈페이지 http://www.llf.or.kr

2005/05/06 오전 12:50
ⓒ 2005 Ohmynews

 

 

한밤, 연꽃 속에서 스님을 추억하다
  박희우(phwoo1445) 기자
어제 일이 있어 조금 늦게 퇴근했습니다. 마산시청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시청 앞 광장에 연꽃이 눈부시게 피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연꽃인데 꽃 속에 전등을 설치했나 봅니다. 낮에 보는 것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습니다.

▲ 아름다운 연꽃입니다
ⓒ2005 박희우
며칠 후면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저는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절에 대한 친근함만은 여전합니다. 저는 절에서 고시공부를 제법 오래했습니다. 물론 실력이 없어 떨어지긴 했지만 지금도 그때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1988년에 '법원직시험'에 합격했습니다. 00지원에 발령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점심을 먹고 청사로 들어오는데 민원 대기실에서 누가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웬 스님이 앉아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스님이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엉겁결에 저도 두 손을 모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스님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스님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스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삼천포 00사에 계신 주지스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누르스름하고 눈에도 힘이 없습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건강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스님이 반갑게 제 손을 잡았습니다. 성공할 줄 알았다며 흡족하게 웃으셨습니다. 저는 얼굴을 붉혔습니다. 고시에 합격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스님이 황급히 손을 저었습니다. 법원에 들어왔으니 고시에 합격한 거나 진배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이 불쑥 제게 두루마리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주지스님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저는 틈틈이 주지스님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매일 똑같은 그림만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언제나 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사 스님이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눈썹이 진하고 검은 수염이 무성했습니다. 인자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인상을 팍 쓰고 있는 게 마치 사천왕상 같았습니다. 저는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그림의 주인공이 '달마대사'라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스님은 '달마도'를 잘 그리셨습니다. 저는 스님이 건넨 두루마리를 펼쳤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달마대사가 아닐까. 제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달마대사가 두 눈을 부릅뜨고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남다른 감회에 젖었습니다. 절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눈이 내리고 이슥한 밤에 스님이 제 방을 찾습니다. 녹차를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눕니다. 차 향기 방안에 가득할 즈음 스님은 제 방을 나섭니다. 이어지는 새벽염불소리에 저는 미처 하지 못한 공부를 계속합니다. 햇볕이 제법 따스한 오후, 스님이 저를 데리고 절 아래 마을을 찾습니다. 신도인 듯한 할머니에게 삶은 닭 한 마리를 시주 받습니다. 스님이 그걸 제게 권했고 저는 허겁지겁 닭다리를 뜯었었습니다.

저는 구내매점으로 스님을 모셨습니다. 스님이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스님의 집안동생이 형사사건으로 구속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어렵게 말을 이어갔지만 저는 계속 손가락만 만지작거렸습니다. 당시 저는 갓 들어온 신참이었습니다. 조직의 생리는 물론 업무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슨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와드릴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일일이 스님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스님의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님,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스님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제 손을 잡으시더니 꼭 한번 절에 오라고 하십니다. 저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그게 스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몇 년 후에 스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굳이 저는 스님의 죽음을 '열반'이나 '입적'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스님의 도(道)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스님은 지극히 인간적이셨습니다. 세속과 인연을 끊었으면서도 차마 집안 동생의 불운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눈시울을 붉히곤 합니다. 그때 왜 스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곤 합니다. 죄는 죄고 사람은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아무리 제가 갓 입사한 처지였다고는 하나 충분히 그런 사건 정도는 알아봐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무심한 세월입니다. 그때가 1989년이었으니 벌써 16년이 흘렀습니다. 열 몇 번의 이사를 다니다보니 스님께서 주신 '달마도'도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스님께서는 평소에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불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 안내는 얼굴이 공양이고, 험한 말 안 하는 입이 미묘한 향이라고 했습니다."

스님의 삶은 이러했습니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그 절에 가봐야겠습니다. 스님과 함께 보았던 연꽃이 지금도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2005/05/10 오전 9:02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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