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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발표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현직 교사가 할아버지의 친일 행위를 고백하는 편지를 써 화제가 되고 있다. 홍익대학교 사범대 부속고등학교에서 수학교사를 맡고 있는 이윤(61)씨는 지난 3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보낸 이메일에서 자신의 할아버지가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오른 이준식이라고 소개한 뒤 "본인은 친일인명사전이 만들어진다면 '당연히' 이렇게 그 성함이 기재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담담한 소감을 피력했다. 1895년 충북 옥천 출생의 이준식은 토지측량기사로 일제 하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 30년대 말 음성군수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기도 한 이윤씨는 "할아버지께서는 해방 후 지난 과거를 버리시고 은둔자로 시종하는 삶을 사셨다"라며 "붓을 놀려 사는 소위 '조·중·동'을 필두로 하여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속죄하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새삼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 한탄했다. 다음은 이씨가 민족문제연구소에 보낸 이메일 전문.
이에 본인은 자신의 조부님이 일제관료로서 이번 명단에 실린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자신의 소회를 피력하고자 합니다. 이번 명단에서 1168번째에 위치한 관료부문의「이준식(李畯植)」님이 바로 저의 할아버지로서, 본인은 친일인명사전이 만들어진다면 '당연히' 이렇게 그 성함이 기재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입장이었습니다. 1895년(을미년)에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서 출생하셨던 조부님은 증조모님의 독려로 일찍부터 대처로 나가 신문물에 눈을 뜨고자 하셨답니다. 장손인 제가 집안에서 들었던 이야기로는 조부님은 토지측량기사로 일제의 관료생활을 시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일제의 조선병합 후 대대적으로 시행했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조부님은 충북도 관내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1930년대에 보은군의 내무과장을 거쳐 30년대 말에 음성군수 자리로 승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기는 당신의 40대 초반이시고, 중일전쟁이 일어났던 시기로 짐작이 됩니다. 40년대로 들어와서는 공직을 물러나셔서 경부선이 지나는 영동으로 내려오셔서 산금회사에 관여하시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일제의 고등관료로서 군수자리에까지 오르셨으나 성품이 청렴결백하시고 의기와 긍휼심이 많으시어 이재(理財)와는 담을 쌓고 해방 무렵 은퇴 시에는 전답은커녕 집 한 채조차 갖고 계시지 못하셨습니다. 이러니 주변에서(누구보다도 맏며느리이신 제 어머니부터도) "군수까지 하신 양반이 얼마나 주변머리가 없었으면 집 한 칸 마련을 못했을까?"하는 푸념을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조부님의 장손으로서 해방 전해에 영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병약하셔서 경제적 능력이 별로 없으셨고, 큰 숙부님은 경도제대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군 소위로서 해방을 맞으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호사를 하셨다면 숙부님 대학공부를 시킨 일일 것입니다만 숙부님도 조선경비대 창건당시 옛 동료들의 집요한 권유를 뿌리치고 교직으로 들어가셨습니다.(당시 일군 출신들이 건국초기 대거 군문에 들어가 '출세'를 했던 것에 대비되는군요) 할아버지께서는 해방 후 지난 과거를 버리시고 은둔자로 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온화한 성품으로 주변의 존경을 받으셨는데도 약주를 드신 날에는 옛날 사람들을 나무라는 주정을 늘어놓곤 하셨습니다. 제 어릴 적 기억입니다만 자유당 이승만 정권에 빌붙어 호가호위를 하는 옛 지인(충청 출신 군수급 관료)들을 나무라는 푸념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속죄는커녕 한 술 더 떠 독재자의 주구노릇을 한다는 꾸짖음 같았지요. 저는 1960년대 대학가에서 가장 큰 이슈였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미력한대로 서울사대 쪽 투쟁을 거들었던 사람입니다. 졸업 후 소시민으로 돌아와 대가족의 가장으로서 식솔을 거닐다가 1990년대 말에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친일문제를 실천하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방대한 친일인명사전을 기획한다는 신문기사를 접하였습니다. 아, 바로 이곳이 내가 들어가 할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찼습니다. 일제치하에서 그들의 수족이 되는 고급관료가 되셨던 할아버님. 그렇지만 속으로는 창씨한 것이 싫어서 맏손자의 이름에서 돌림자를 빼어 성명 넉자를 벗겨주셨던 은유!(그래서 해방 후 외자인 제 이름이 셋에서 두 글자로 줄어든 것이지요). 해방 후에는 집 한 칸 없이 작은 숙부님이 입대하시자 산에 올라 손수 나무까지 해서 짊어지고 내려오셨던 그 곤궁스러운 고생!(오죽하면 동네 사람들이 '군수댁' 영감이 낫질까지 한다고 혀를 찼겠습니까?) 이제 친일인명 사전의 편찬에 앞서 일차적으로 단순히 그에 수록될 명단만을 발표했을 뿐인데도 세상은 왜 이리도 소란스러운지? 붓을 놀려 살고 있는 소위 '조·중·동'을 필두로 하여 입에 개 거품을 물고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속죄하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새삼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일개 무명교사일망정 내 자신부터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서 이런 어두운 과거를 규명하고 그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전폭적인 성원을 보냅니다. 외세에 의한 뼈아픈 분단을 안고 출발한 민족의 해방이 진정한 해방일리 없습니다. 교활한 친일파의 후예들은 이제 한술 더 떠 친미도 아닌 숭미파가 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의 기본과제는 사대주의의 척결과 민족정기의 확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세기 전의 그 풍전등화 같던 시대가 되풀이되고 있는 듯한 오늘날 우리는 진정 스스로가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새 역사의 창조자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 참으로 거북한 말씀을 첨부합니다. 저희 일가 중에는 그때(그 좋았던 시절에) 저희 조부님이 '상식대로만' 재산관리(?)를 했더라도 해방 후 그토록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며 저희(돌아가신 조부님을 지칭하는 의미겠죠)를 딱하게 생각하는 어른들도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제 조부님이 해방 후에 일제가 지급하던 연금마저 받지 못하게 되어 참 안타깝게 되었다는 말에는(해방이 오지 않았어야?) 그저 두 눈, 두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입니다. 정말 가까운 주변 하나 하나에까지 파고든 일제잔재를 청산한다는 것이 이만큼이나 어려운 일일까요? - 친일인사 명단 발표(1차) 며칠 후에 아픈 마음으로 자신을 고백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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