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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가족 그리움 묻고 떠난 아! 조정순택 선생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5. 10. 3.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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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가족 그리움 묻고 떠난 아! 정순택 선생
전향서 한 장이 남긴 상처... 7만2천km 국보법 철폐순례
텍스트만보기   박준영(jajumb) 기자   
▲ 서울 보라매병원에 차려진 선생의 빈소.
ⓒ2005 박준영
"시원한 생맥주 한 잔 먹고 싶어."

32년5개월간 옥고를 치른 고 정순택(향년 84세) 선생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다.

권낙기(통일광장) 선생은 정순택 선생이 술 한 잔 입에 댈 줄 모르는 어른이었다고 했다.

"술 한 잔 마실 줄 모르는 양반이 갑자기 시원한 생맥주 한 잔 마시고 싶다는 거야. 그건 진짜 술이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통일된 조국이 보고 싶고, 고향에 가고 싶고, 가족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신 거야. 오죽 답답하셨으면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담으셨을까."

지난 9월 30일 새벽 갑작스런 병세악화로 하루 종일 고생하시던 정순택 선생은 결국 오후 6시 50분경 그토록 바라던 통일조국, 고향산천,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정순택 선생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 보라매병원은 선생의 별세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정부당국이 북녘에 있는 선생의 가족들의 방남을 요청해, 취재진의 취재열기도 뜨거웠다.

그러나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은 선생의 자제분들이 남녘에 올까, 언론보도가 어떻게 나올까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32년이 넘는 오랜 세월 고문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육체를 가지고, 비록 강제전향일지라도 전향서를 쓴 당신을 채찍질 하며 5년여 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반미와 국가보안법 철폐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진심으로 이야기한 선생의 겸허함과 실천력을 곱씹을 뿐이었다.

"나도 비전향장기수지만 나는 정순택 선생이 정말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해. 그 분은 정말 자기 성찰을 할 줄 아는 분이셨고 실천으로 자신의 마음을 씻었던 분이야."

권낙기 선생의 눈에 비친 정순택 선생은 포악하기 그지없는 고문과 협박에 의해 강제전향을 했지만 강제전향의 책임을 권력에 돌리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먼저 성찰할 줄 아는 분이었다. 자기 성찰에서 겸손함이 나오고 그를 승화시켜 실천으로 부족함을 메울 줄 아는 진정한 애국자였던 것이다.

7만2천km 거리순례... 사람들과 반미·국보법철폐 대화 나눠

▲ 고 정순택 선생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1년부터 7만2천km의 거리를 순례, 사람들을 만나 반미와 국가보안법 철폐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2005 고 정순택 선생
정순택 선생은 고문후유증으로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순택 선생은 전향서로 인해 상처받은 당신의 양심을 치유하고 젊은 시절 심장에 새겼던 민족의식, 반미의식을 표출하기 위해 2001년부터 장장 7만2천㎞의 거리를 버스로 철도로 오고가며 전국 어디고 안 가본 곳이 없다.

철도를 기다리면서도 물병 하나를 가운데 놓고 당신 또래의 반공노인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옆 자리에 앉은 젊은이들에게는 역사의 진실을 조목조목 알려줬다. 그러기를 5년, 암 진단을 받고 쓰러지기 한 달 전까지 선생은 항상 지팡이를 들고 중절모를 눌러 쓰고 '국가보안법 철폐' '반미'가 쓰인 어깨띠를 두르시고 문밖을 나서시곤 했다.

80연세의 노인이 홀홀단신으로 우리 민족에 대해, 미국에 대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국을 누비며 버스 안에서, 기차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람과 5년을 하루같이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말 그대로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들과 진심을 나눈 정순택 선생. 선생은 그렇게 실천으로 80평생을 묵묵히 총화하고 있었으리라.

하기에 정순택 선생은 남은 이들의 기억 깊이 새겨져 있었다. 선생을 비롯한 장기수 어르신들의 2차 송환을 위해 애썼던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회장은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쳤던 조국의 통일을 보시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라며 정순택 선생을 회고했다.

권오헌 선생은 한마디로 "고귀한 인덕과 품성을 가진 해박한 지식인"이라고 정 선생을 칭했다. 84세의 나이에도 사고에서나, 생활에서나 합리성을 잃지 않았다는 정순택 선생은 고령의 나이에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고 남다른 필력으로 좋은 글들을 많이 남겼단다.

남쪽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고급관리를 지낸 선생은 월북 후에도 고급관리로 일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분단 원인이 미국이라는 것을 너무나 빨리 깨달았기에, 전쟁 시기 미국의 만행을 목격했기에 선생은 지식인에서 멈출 수가 없었단다. 남 먼저 깨달았기에 실천 또한 앞섰던 선생은 58년 체포 후 32년여 간의 모진 옥고를 치렀음에도 숨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실천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선생과 4년여를 함께 생활한 김영식(장기수) 선생은 자신보다 10년이나 많은 연세인 정순택 선생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단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4시나 5시에 일어나셔서 몸을 깨끗이 씻으시고 매일 방도 쓸고 닦고 하셨어. 난 도저히 매일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 그런데 정 선생은 한번도 거른 적이 없으셔."

"부친의 별세 소식에 남쪽 하늘만 쳐다보며 땅을 치고 있을 가족들...

▲ 송환을 앞둔 비전향 장기수가 남한에서 자신을 돌봐주던 봉사자의 손을 잡고 오래도록 놓지 못했다.
ⓒ2005 신동필
반미순례를 하고 오신 날이면 피곤해서 곧바로 쓰러졌다는 정순택 선생을 보기가 너무 안타까워 "그 정도면 됐다. 이제 그만 하시라"는 말도 했단다.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으셨다는 정 선생은 며칠 쉬고 난 후면 "움직일 만 해"하시며 다시 채비를 하시곤 했다.

"내가 수학연산을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라며 그 방법을 담은 책자를 직접 선물하며 어린아이처럼 자랑스러워 하셨다는 정순택 선생.

선생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많이 이들이 장례식을 찾았다. 그러나 선생의 가족만은 보이지 않는다. 버젓이 살아 있음에도 선생의 아들들은 먼 북녘땅에서 부친의 별세 소식에 남쪽 하늘만 쳐다보며 땅을 치고 있으리라. 그렇게 50여 년을 멀리서 그리워만 했던 정순택 선생의 가족.

그렇게 그리웠던 가족이기에,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고향이기에,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하나 된 조국이기에 선생은 가족과, 고향, 조국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는 심정으로 민중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심장 속에 반미와 애국을 심어주었으리라.

전향서라는 종이 한 장이 남긴 양심의 상처를 자기반성과 성찰, 그리고 완강한 실천으로 치유한 선생의 눈앞에는 분명 가족의 환한 웃음과 정겨운 고향 어귀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십수 년 제대로 들을 수도 없었던 선생의 귀에는 조국통일을 맞은 기쁨의 함성이 메아리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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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순택씨 장남 "시체로 오시다니..."
텍스트만보기   연합뉴스(yonhap)   
(판문점=연합뉴스) 공동취재단.정준영 기자 =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어머니도, 우리 자식들도 바랬으나 이렇게 시체로 오시다니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남파간첩 출신 장기수 정순택씨가 2일 오후 6시37분께 생전 소원이던 북송을 저승에서 이루며 1958년 남파된 뒤 48년여만에 꿈에도 그리던 가족의 품에 안겼다.

지난 달 30일 오후 6시50분 사망한 뒤 약 48시간만이다.

정씨의 장남 태두(김책공업종합대 선박공학부 교수)씨는 이렇게 아버지를 맞았다.

태두씨는 아버지의 시신을 접한 이날 이렇게 밝힌 뒤 "말씀드릴 게 (더 이상) 없습니다"라며 말을 맺었다고 우리측 한 참석자는 전했다.

9세 때 아버지와 헤어진 뒤 태두씨가 견뎌야 했던 이산의 세월은 이미 그의 눈물마저 앗아가 버렸지도 모른다.

태두씨의 이런 반응은 이미 정씨가 2000년 9월 1차 장기수 북송에서 아버지가 포함되지 않으면서 생긴 안타까움에 이어 이번에 싸늘한 시신으로 아버지를 맞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태두씨는 아버지가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2000년 8월12일 평양방송에 출연, "꿈이 아닌 현실로 펼쳐지게 될 아버지와의 상봉을 날을 앞두고 하루가 천날 맞잡이로(같이) 길어 보이는 것만 같고 그저 하루에도 열두번식 달려가 만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재회를 학수고대했던 정씨의 입장에서는 주검이 된 이날도 애초 예상했던 인도 시간인 오후 4시에서 2시간30분 이상을 또 기다려야 했다.

평양에서 달려온다던 아들의 도착이 늦었기 때문이다. 이미 해가 떨어진 뒤였다.

이런 인도 행사는 오후 6시37분을 전후해 불과 5분만에 끝났다.

이 때문에 '썰렁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북측에서는 현장을 찍거나 취재하는 기자들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았다.

북측에서는 태두씨와 북측 연락관 2명, 운구요원 6명이 나와 시신을 인수한 뒤 별도의 앰뷸런스 없이 소형 버스를 이용해 북측으로 운구해 갔다.

앞서 정부의 시신 송환 결정으로 이날 오후 1시45분께 정씨 시신을 실고 서울 보라매병원을 출발한 앰뷸런스는 경찰차 2대 등의 인도를 받으며 자유로를 거쳐 오후 3시15분께 판문점에 도착했다.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들은 판문점 도착 직후 자유의 집 1층 로비에서 시신과 함께 북측에 건넬 정씨의 유품을 확인했다.

유품은 대형 여행용 가방과 회색 손가방, 라면박스 크기의 상자 1개였다.

손가방 안에는 '정순택 선생님이 반미 시위 때 들어다녔던 가방'이라고 메모와 함께 흰색 중절모와 수건, 벨트, 속옷, 셔츠, 사진 등이 들어 있었다.

사진 20여장 중에는 정씨가 생전에 시위현장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흰 상자 겉면에는 "통일애국열사 정순택 선생님 유품입니다. 유리액자가 들었으니 조심해 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정부 관계자는 "북측이 사전 협의과정에서 유품 중에 문제가 되거나 (남측이) 불편한 게 있으면 임의 처리해도 된다는 입장을 알려왔다"며 "그러나 특별히 문제되는 게 없어 모두 유족에게 인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앞서 앰뷸런스가 판문점에 가까운 통일대교 남단에 도착하자 기다리던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 관계자들이 정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정씨는 북측에서 장례절차를 거쳐 남측의 국립묘지격인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prince@yna.co.kr
장기수 정순택씨 시신 북 유족에 인계
통일부 "전적으로 인도주의적 차원의 조치"
텍스트만보기   연합뉴스(yonhap)   
(판문점=연합뉴스) 공동취재단.정준영 기자 = 지난 달 30일 사망한 남파간첩 출신 장기수 정순택씨가 불귀의 객이 되어서야 북측 가족의 품에 안겼다.

정부는 2일 오후 6시37분께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와 군사정전위원회 사이 군사분계선에서 정 씨의 시신과 유품을 북측 유족에게 인도했다.

시신 인도는 이날 오전 9시30분께 정씨의 시신을 재북 가족에게 보내달라는 북측의 요청을 우리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이뤄졌다.

정부가 남측 거주 사망자의 시신을 북측 유족에게 인도한 것은 처음이다.

또 정씨가 생전에 1989년 전향 후 가석방된 뒤 1999년 '고문과 강압에 의한 전향서는 무효"라며 전향 철회를 선언했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비록 사망했지만 전향 장기수의 첫 송환 조치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이날 정씨 시신의 북송은 앞으로 정부가 전향 장기수의 북송을 적극 검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정부는 암으로 서울 보라매병원에 입원 중이던 정씨가 지난 달 30일 갑자기 패혈증이 겹치면서 2∼3일 더 생존할 것이라는 소견이 나오자 같은 날 오후 2시 대한적십자사 총재 명의로 임종을 위한 재북 가족의 남측 방문을 요청했다.

정씨는 이 요청에 대한 북측의 답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같은 날 오후 6시50분께 84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정부는 오후 10시30분께 북측에 사망 사실을 알렸다.

정부 당국자는 "장기수 북송 문제를 검토하던 중이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갑자기 정씨의 병세가 악화돼 북측 가족의 임종이 이뤄지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면서 "이번 임종 요청과 시신 송환 결정은 전적으로 인도주의적 차원의 조치"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런 조치가 남북관계 화해와 인도적 문제 해결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충북 진천이 고향인 고인은 1948년 상공부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중 월북해 북쪽에서 기술자격 심사위원회 책임심사원으로 일했으며 1958년 남파됐다 체포된 뒤 1989년 12월 전향후 가석방될 때까지 31년 5개월간 복역했다.

정씨는 1999년 전향 철회를 선언하고 6.15 공동선언 직후인 2000년 9월 1차 북송 당시 북송을 희망했지만 전향자라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됐고, 그 후로도 북송을 희망해 오다 지난 달 4일 입원, 췌장암 및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고인은 북측에 아들 4형제를 두고 있다. 부인은 1990년대 중반 숨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아들 4명은 모두 고위직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글은 자주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2005-10-02 13:05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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