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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현수막인가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2. 28.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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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현수막인가
한자 남용을 경계함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한나영(azurefall) 기자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작은 딸이 학원에서 내준 숙제를 하느라 한자를 '그리고' 있다. 초등학교 때도 한자 공부를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아이가 쓰고 있는 한자를 보니 그냥 '무늬만 한자'인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는 듯하다.

한자를 쓰고 있는 게 아니라 '그리고' 있는 이유는 물론 한자 공부를 열심히 안 한 탓일 게다. 하지만 학교의 수업 역시 그냥 시간만 보낸 허울 좋은 한자 수업이었던 모양인지 아이는 한자의 기본 순서조차 모르고 있다.

다른 집 애들을 보면 한자 급수를 딴다고 어렸을 때부터 일부러 한문 학원엘 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때가 되면 학교에서 다 하게 되는 한자 공부인데 미리 할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학교에만 맡겨둔 한자 교육이 좀 부실했던 모양이다. 공책의 맨 앞에 나와 있는 예(例)를 보고 아이가 똑같이 그린 모양이 아주 괴발개발인 것을 보면 말이다.

아이의 공책을 들여다보면 '들 입(入)과 사람 인(人)' 혹은 '손 수(手)와 털 모(毛)', '아닐 미(未)와 끝 말(末)'의 획이 마구 뒤섞여 쓰여 있다. 틀린 글자를 찾아 고치게 하고, 옆에 앉아 지켜보다 순서를 제대로 알려주고 다시 쓰게 하니 아이는 어렵다고 입을 내민다. 또 비슷한 글자가 많아 영 헷갈린다고 불평도 한다.

획수가 많은 '나라 국(國)' 역시 순서를 제 멋대로 쓰기 일쑤여서 아이는 일단 큰 네모(口) 하나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갈 다른 획들을 마구 쑤셔(?) 넣는다.

한자를 쓰고 익히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교과과정에 '한문'이 들어가는 것을 기본적으로 찬성한다. 우리에게 기초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최근 들어 입사 시험에 한문을 넣는다는 기업의 발표가 있은 후 이를 두고 찬반 양론이 맞섰던 것을 기억한다.

어느 라디오 토론 프로그램을 들으니 우리에게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는 측과 그렇지 않다는 측이 서로 팽팽히 맞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것을 봤다. 어느 측도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양 측의 의견을 들어보면 둘 다 일리 있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한문 교육에 대한 내 생각은 우리말의 상당 부분이 한자로 조합된 글이므로 기본적인 한자 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한자 공부를 시작한 게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고등학교 1학년 때 한문 선생님이 얼마나 우리를 들볶으셨는지(?) 그 때 배운 한자 하나 하나는 아직도 머릿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당시 한문 선생님의 지도는 거의 '고문' 수준에 이를 만큼 혹독했다. 아직도 기억하는 고1 한문책의 1과는 다음과 같은 낱말들로 시작된다.

희망(希望), 이상(理想), 미래(未來), 성취(成就), 고진감래(苦盡甘來)…. 그리고 연습 문제에 나왔던 고진감래의 반대말, 흥진비래(興盡悲來).

그 때 열심히 배웠던 까닭에 나는 결혼한 뒤 다시 편입하여 공부한 중문학과에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장학금까지 받는 기특한(?) 일도 벌였고 결국 그 과정을 무사히 수료할 수 있었다. 어쨌건 나는 한자, 한문 교육에 대해선 비교적 우호적이다.

그런데 우리의 실생활에서 이런 한자가 종종 남용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우리글 우리말인 '한글'이 있다. 그러니 모든 글과 말에서 한글을 기본으로 사용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좋은 우리글 '한글'을 써도 전혀 문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 굳이 한자를 쓰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게 된다.

남부 지방의 어느 도시를 여행할 때였다. 시내를 다니다가 문득 녹색 도로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온통 한자 뿐이었다. 관광 특구도 아닌 그곳에 한글 하나 없는 한자 표지판이 왜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면 찍어 왔을 텐데 그냥 혀만 끌끌 찰 뿐이었다. 도대체 그곳이 어느 나라인지, 어느 국민들이 사는 지 한심스러웠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한글로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쓰는 법률 용어, 건축 용어에서는 아직도 한자 용어가, 특히 일본식 한자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고 들었다. 빨리 바뀌어야 할 것이다.

봄방학 중인 딸이 오늘 학교에 갔다. 교감 선생님이 정년 퇴임을 하기 때문이란다. 오랫동안 교육 현장에서 수고하신 선생님께 박수를 쳐드리고 인사를 드리는 건 제자로서의 참된 도리일 것이다. 그런데 학교 교문 위에 내걸린 현수막을 보고는 좀 어이가 없었다.

▲ 누구를 위한 현수막인가
ⓒ2004 한나영
頌 OOO校監선생님 名譽退任式 祝

웬 한자 현수막인가. 누구더러 읽으라고 한 걸까. 한자 교육을 위해서? 한글로 쓰면 경박해 보여서 한자로 썼을까. 이런 데까지 굳이 한자를 쓸 필요가 있었을까. 더구나 이곳은 나이 지긋한 분들이 모인 '경로당'도 아니고 싱그러운 10대들이 모인 중학교가 아닌가.

누구의 발상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의 한자 현수막을 내건다고 교사의 품위나 권위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교사의 품위나 권위는 겉으로 드러난 한자, 중압감이 느껴지는 한자를 통해 세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2004/02/27 오전 11:39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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