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땅에서는 교육 때문에 죽어가는 존재가 참 많다. -----2004-3-26 경기고 일산의 한 고교에서 과중한 수업부담과 업무로 인해 죽은 고 김형석 교사를 생각하면서.
1. 학생들의 의식 속에서 싹을 틔우는 적성별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우주 비행사, 우주선 제작기술자, 의료기기 첨단 기술자 등등이 되기 위한 희망이 죽어가고 있다. 물론 이들 기술진들이 국내에도 있다. 그러나 너무 소수이며 이들을 뒷받침하는 산업공학 및 기술, 기능보유자가 태반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서 기술의 저변토대가 빈약할 뿐만 아니라 상층부 첨단 기술자도 부족하다.
2. 학생들과 교사들의 저항의지가 나날이 죽어가고 있다. 고교생을 보면 1학년 때는 활기차다. 그러나 6개월 정도만 지나도 0교시 폐지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다. 이미 이 눈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길러지기 시작한다. 입이 있어도 열 수 없는 권위주의적인 풍토, 매가 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매맞을 수 있다는 원초적인 불안에 노출된다.
노르웨이 고교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교과서 무상공급]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국가를 상대로 집회를 연 적이 있었다-(박노자의 책, [당신들의 대한민국] 혹은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중에서). 한국에서 4.19 주역은 시민과 고교생들이었다.
지금 한국은 아시아와 같은 맥락 아니 더 심한 상태에서 학생들의 민주적인 저항의지가 삶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이미 많이 죽어있다. 교사들은 그 이상의 억압적 교육행정(장학과 감사는 현장을 돕고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위주로 되어 있다. 학교장의 예산유용, 리베이트가 횡행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잡아내려는 의지, 외부 회계전문가를 동반하는 전문적 감사의지는 전혀 없다. 애꿎은 교사들만 감시한다.) 이러한 후진적이고 관료적인 맹목적 지배욕망들이 교사들의 교육적 열정을 죽이고 있다.
3. 실제 학생과 교사들의 물리적 신체가 죽어가고 있다. 이것은 위 1,2번의 결과다. 정신이 죽으면 이미 몸이 죽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마디로 학생 아니 교사들이 기층민인데, 이들의 저항의지가 예민하게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근본문제다. 권력층의 지배욕망, 현장에 대한 무지와 실적에 대한 초조함 등이 역대 장관과 관리들의 의식을 점해왔으며 이들이 민주적으로 의견을 수렴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을 방관하는 시민과 교사들이 근원적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다.
지금도 장관이 사교육에 굴복하고 아래 어느 선생님이 지적한 것 처럼 [학생들을 붕어빵으로 만드는 EBS과외]가 예전의 위성과외와 이름만 바꿨을 뿐 재현되고 있다. 즉 지엽말단적인 하나의 문제를 놓고 교육당국은 일을 다했다는 자긍심에 빠져있다. 이를 비판하고 교육의 전반적인 문제인식과 구조적 개혁안을 비판, 제안, 추진하도록 촉구하는 교사와 시민 그리고 학생의 저항이 없다. 이 저항이 없는 곳에서 독선 교육분야의 독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수년 전 전교조 신문에서도 프랑스 학생 10만여명, 약 2년 후에 교사가 합세한 13만여명이 [학급당 학생수 25명이 너무 많으니 교사를 더 선발해주시오!]를 거리에서 외친 적이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사전에 위기의식을 느낄 줄 모르는 한국인! 느껴도 저항하지 않는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훈련된 체념섞인 끈기와 인내는 지금도 단절되지 못하고 있다.
냉철히 생각해서, 전교조가 NEIS에서의 정보화 인권, 사교육에 대처하는 장관의 무대책에 대한 비판, 탄핵결정에 대한 시국선언 등 중요한 실적과 비판을 가해 왔다. 소중한 일들이 아닐 수 없지만 이것은 부분들이다. 전체에 대한 교육적 처방도 가지고 있다. 민주노동당도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개혁안을 마련해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대적인 서명과 집회를 통한 물리적인 힘의 합리적 사용, 이를 통한 개혁의 관철 앞에서 정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집회와 시위가 하나의 저항이면서도 안정위주의 정서를 해치는 것인 양 느끼는 훈련된 조건화의 결과일 수도 있다. 또 너무 많은 정책적 실수와 개혁대상이 많아 아예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분화되고 예민한 저항이 많이 그리고 사전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지의 상실이 관찰된다. 이것이 중대한 상실이다! 우리는 지금도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교사문화--http://edunews.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