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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읽어주고 행복을 받네요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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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읽어주고 행복을 받네요


△ 대전 책·봉사 동아리 ‘책 읽어주는 엄마’ 회원이 3일 오전 대전시 용운도서관을 찾은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있다.

대전 아줌마동아리 ‘책 읽어주는 엄마’

“우리들은 이야기 엄마 책 읽어 주는 엄마, 이야기 싣고 달려가는 책 읽어 주는 엄마….”

대전 용운 도서관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30분부터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아줌마들의 모임 ‘책 읽어 주는 엄마’들이 백창우 시인이 만든 동요 <굴렁쇠>를 개사한 노래로 이 모임의 주제 노래다. 노랫말대로 아줌마 동아리 ‘책 읽어 주는 엄마’는 어린이, 장애아 등에게 책을 읽어 주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 어디나 달려가는 억척 봉사대다.

2001년 6월 지역 생활정보지에 난 ‘책 읽어 주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합니다’라는 줄광고를 보고 모인 10여명의 주부들이 시작한 모임은 30여명의 회원이 한데 어우러지는 봉사 단체로 거듭났다. ‘독서가 생활이요, 독서는 행동’이라고 믿고 있는 ‘책 엄마’들은 좋은 책과 글을 알리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2001년 생활정보지
줄광고 보고 모여

매주 토요일 용운도서관에서 이뤄지는 책 읽어 주기 행사는 한달전에 2~4명씩 당번을 정해 읽을 책을 정하고 준비를 한다. 책의 내용을 미리 파악한 뒤 책을 읽으면서 보여 줄 동작, 말소리, 흉내, 간단한 소품, 책 내용과 관련 있는 노래 준비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물속 동물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 3일 행사에는 책과 관련된 그림과 모형 소품은 물론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올챙이송>까지 준비해 며칠동안 연습한 무용과 곁들여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매주 토요일엔 도서관
금요일엔 맹학고에 등장

매주 금요일에는 대전시 가오동에 있는 시각장애아 특수학교 대전 맹학교에 ‘책 엄마’들이 나타난다. 2002년 3월부터 대전 맹학교를 찾고 있는 ‘책 엄마’들은 사실 맹학교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주는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많단다. 처음에는 장애인들에게도 책을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이들을 찾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동화구연 테이프’가 자신들보다 훨씬 ‘유능하다’는 것을 안 ‘책 엄마’들은 그래도 기계음보다 사랑을 담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동화구연을 배우기 시작했다. 십시일반으로 강사료를 모아 전문 동화구연가를 초빙했다. 2달여동안 맹렬히 연습한 뒤에 아이들을 만났지만 여전히 힘겨웠다. 주위 집중이 덜하고 감정표현이 서툰 장애아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해 들이는 힘에 비해 반응이 적자 일부에서는 처음의 의욕적인 마음보다 불만과 불평, 한숨이 더 커갔다. 하지만 “아이들이 표현은 하지 않지만 그냥 ‘책 엄마’들이 와서 말해주고 보듬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한다”는 학교의 귀띔을 듣고 마음을 열면서부터 장애아들의 친구요, 선생님이요, 아줌마요,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성탄절 송년 잔치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소 ‘책 엄마’들을 누구보다 잘 따르던 준범이가 “나는 4학년이 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시무룩해 했다. ‘책 엄마’와 맹학교 교사들이 을르고 달래 이유를 물었더니 준범이는 “3학년때까지는


△ 대전 책읽어 주는 엄마 모임 회원들이 어린이·장애아 등에게 읽어 줄 책의 내용을 공부한 뒤 책나라 큰잔치 등 모임 행사 기획회의를 하고 있다.<책 읽어 주는 엄마 제공>

지난해 송년잔치 때
눈물바다 이룬 사연

‘책 엄마’들의 책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4학년이 되면 들을 수 없어서 4학년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순간 잔치 한마당은 눈물바다로 변했지만 아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밴 회원들은 뜨거운 눈물을 훔치기만 할 뿐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맹학교 모둠장인 진미영(36)씨는 “학교에 갈 때마다 울 일이 생기고 또 매번 울지만 아이들과 나누는 감동의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며 “우리는 책을 읽어 주지만 아이들은 우리에게 나누고 함께 하는 행복을 준다”고 말했다.

좋은 책을 어린이 등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겠다는 본 뜻을 소중히 하고 있는 ‘책 엄마’들은 봉사의 영역과 책을 읽어주고 책의 맛을 공유하는 범위를 조금씩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 2002년 8명의 회원이 3개월동안의 준비끝에 서대전 야외음악당에서 선을 보인 ‘책나라 큰잔치’는 지난해에는 1600명이 참가하는 지역의 대표적 책 잔치로 자리잡는 기적을 일구기도 했다. 괴짜 책 엄마로 불리는 최미라(39)씨는 “아줌마 몇 명이 준비했다면 믿지 않는 책 잔치라는 말을 듣는다”며 “그러나 석달전부터 머리를 싸매고 발로 뛰어다니는 열정을 본다면 이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6월에는 신탄진 도서관에서 ‘책 읽어 주는 엄마’ 신탄진 모둠을 결성한 뒤 신입 회원 교육을 마치고 9월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책 읽어주기 봉사’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김정순(31) 회원 등이 중심이 돼 태평동에서 3번째 책 읽어주는 엄마 모둠을 준비하고 있다. 태평동 지역 모둠은 신입회원 교육을 마쳤으며 현재는 관리사무소나 주민회의 등과 도서관 이용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

봉사를 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지요

‘책 엄마’들은 요즘 신선한 외도를 꿈꾸고 있다. 어린이와 장애아 등에게 책을 읽어 주고 봉사를 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여성, 노인 등에게 봉사를 하기 위해 연극 공부에 한창이다. 이들은 극단 새벽에서 연출을 하고 있는 연극인 한선덕씨로부터 일주일에 1~2차례씩 대사 표현, 몸동작 등 연극을 ‘제대로’ 배우고 있다. 맹연습을 중인 작품은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로 오는 7월께 무대에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성공적인 무대 데뷔를 한 다음에는 창작 아동극에도 도전해 어린이, 장애아, 노인, 여성 등을 아우르는 문화작품을 내놓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늘 회원들의 주머니 신세를 져야 하는 모임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애교섞인 상업성도 숨어 있다.

하은숙(42) 회장은 “우리 모임은 ‘봉사를 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던 회원이 어린이, 장애아 등과 만나면서 자연스레 ‘봉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모임”이라며 “책을 읽어주고 남에게 힘이 된다는 행복감에 영원히 묻혀 살고 싶은 아줌마들이 때론 고맙고, 때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대전/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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