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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아름다운 쓰레기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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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아름다운 쓰레기들

기발한 재활용 예술의 세계를 만드는 작가들… 버려진 물건에 생명과 실용성을 부여하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재활용 생활예술의 선구자가 되려는 김동환(26)씨를 만나기 위해 서울 도시철도 5호선 화곡역에 갔다. 마치 ‘접선’을 하는 것 같았다. 서로를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는데 그는 대뜸 ‘중절모’를 쓰고 나오겠다고 했다. 중절모는 중년 신사들의 용품이라고 생각한 선입견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역시 예술가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잠시 기다렸더니 수줍은 청년이 다가왔다.


△ 쓰레기에 예술을 입혀 생활용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김동환씨.(김수병기자)

현수막 가방, 대박 터뜨리다

그가 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작업실로 쓰는 집은 반지하 연립주택이었다. 작업실이라고 해봐야 재봉틀이 전부였다. 작업실은 대낮에도 형광등을 켜야 했고, 재봉틀 옆에는 백열등을 따로 둬야 하는 공간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구겨진 현수막과 켜켜이 쌓인 종이상자, 구멍이 숭숭 뚫린 소파 가죽 따위였다. 그곳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생활소품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어느새 김씨의 작업실이 마법사의 활동 무대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늘 보며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쓰레기들이 그의 재봉질과 수작업을 통해 예술품으로 거듭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품 역시 손이 타지 않도록 금고나 장식장에 보관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들은 예술가의 혼이 담긴 일상 생활용품이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물레를 돌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굉장한 기계를, 굉장한 공장들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물레질을 하고, 우리 자신의 옷을 스스로 지어 입는 창조적인 과정을 소유하고 싶다”고 말했다는데, 그는 재봉질을 하면서 “나는 소수를 위하거나 고가의 예술을 바라지 않는다. 지구 환경을 생각하면서 버려지는 것에 아름다움을 입히고 생활력을 부여해 누구나 예술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얘기하는 듯했다. 간디가 독립을 위해 영국을 버리고 물레질을 권했던 것처럼, 그는 환경을 위해 쓰레기를 재발견할 것을 권하고 있다.


△ 김동환씨가 현수막과 종이상자, 가죽 등으로 만든 소품들(위)과 신문지를 이용한 장기판과 말.(김수병기자)

애당초 김씨가 재활용 예술가로 차근차근 준비해왔던 것은 아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널브러진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쓸 데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천을 말아서 집으로 가져갔다. 의류업체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을 살려 재봉질을 했다. “몇 차례 박음질을 했더니 나름대로 개성 있는 가방이 나오더군요. 처음엔 그렇게 재미로 가방을 만들다가 일종의 아트 벼룩시장에 내놓았지요. 거칠게 만든 작품들이었는데도 고객들의 반응이 괜찮았어요.” 현수막을 인쇄하는 데 쓰는 잉크 글씨도 나름대로 개성을 표현하는 도구이기에 지우지 않아도 됐다. 이렇게 개성을 살린 현수막 가방을 지난해 11월 서울시가 마련한 ‘재활용 아트 상품 공모전’에 출품했다. 공모전에서 김씨는 고정관념을 확실하게 깼다는 점을 인정받아 당당히 대상을 받았다.

신문지 장기말, 골판지 액자…

이제 김씨의 재활용 현수막 가방은 대량생산 단계에 접어들었다. 19세기 말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가 ‘실용적 예술’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주도했던 ‘수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의 현대화 작업이 ‘본의 아니게’ 즐거운 외도를 하는 셈이다. 공모전 뒤 서울 종로구청이 수거한 불법 현수막을 ‘아름다운 가게’에 제공해 김씨의 디자인을 토대로 대량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김씨의 아이디어는 여럿에게 이점을 남겼다. 종로구청은 일주일에 1.5t 트럭 분량의 현수막을 소각 처리하는 데 26만원이 들었다. 그런데 현수막을 고스란히 아름다운 가게에 넘기면서 처리비용을 아끼게 됐다. 아름다운 가게는 대량 생산한 현수막 가방을 3월27일 한강시민공원 뚝섬유원지 광장에서 열리는 ‘아름다운 나눔 장터’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공짜로 나눠줄 예정이다.

“손으로 만들던 것을 기계로 만든다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훨씬 많은 쓰레기를 재활용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한 게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서 얼마나 보람 있는지 몰라요.” 김씨의 작업실에는 현수막 가방 말고도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통해 재탄생한 소품이 가득하다. 신문지도 그의 손을 거쳐 과거를 떠올릴 수 없는 예술품으로 거듭났다. 투박한 나무처럼 보이는 장기판을 펼친 뒤, 조그만 나무 젓갈 상자에서 장기말을 꺼냈다. 길다란 육면체의 장기말 위에는 차·포·마·상 등의 이름이 써 있었고, 옆에는 아기자기한 그림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돌처럼 단단한 장기알의 재료는 놀랍게도 신문지였다. 신문지 5일치를 모아서 물에 넣어 종이죽을 만든 뒤 각각의 말을 빗어낸 것이다. 그 밖에도 골판지 상자로 소형 액자를, 커피병으로 워터볼을, 사용한 필름으로 전등갓 등을 만들었다.

작품 재료의 ‘과거’를 알 수 없는 전시회

김동환씨의 재활용 예술 작업은 함께 ‘희망시장’(cafe.daum.net/hopemarket)을 일구는 사람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희망시장은 지난 2002년 5월12일 시작돼 매주 일요일마다 홍익대 앞 놀이터에서 열리는 예술장터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김씨가 내놓은 작품들을 보며 각자의 재활용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렇게 해서 희망시장의 젊은 작가 15명이 만든 재활용 작품들을 오는 21일까지 홍대 앞 희망갤러리에서 열리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희망갤러리는 주택가 차고를 개조해 만든 6평 남짓한 초미니 갤러리. 희망갤러리 큐레이터 이초영(30)씨는 “동환씨의 작품을 보면서 ‘바로 이것이다’는 생각이 들어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함께 전시를 준비했어요. 버려진 물건들에 새로운 생명과 실용성을 부여한 작품으로 재탄생한 것이 놀랍기만 해요. 쓰레기의 해체와 조합의 미학의 발견이라 할 수 있겠네요”라고 말한다.


△ 희망갤러리에서 열리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전에 참가한 임소희씨(왼쪽)와 김주씨.(김진수기자)

‘과거를 묻지 마세요’전에 출품된 작품들의 재료가 된 폐기물을 생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는 흔적만 남았을 뿐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재활용 아닌가. 한복 재활용에 전념하기로 결심하며 니트 작가에서 텍스타일 작가로 옮겨온 김주(29)씨는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한복 가방 두점을 내놓았다. 그가 가방 하나를 만드는 데 바친 시간이 ‘무려’ 3일. 일단 한복 마고자 한벌을 두 시간에 걸쳐서 잘라야 한다. 한복 천은 ‘문양직물’(jacquard)이라 결 따라 찢어지지 않기에 적절한 간격으로 가위질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4시간에 걸쳐 나무 틀(직조기)을 이용해 천으로 만든 다음 이틀에 걸쳐 재단과 재봉질을 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재료 구입비가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게 매력적이죠. 한두번 입은 뒤 장롱 속에 있다가 버려지는 것이라 옷감 상태도 좋고요. 한국적인 소재라서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죠.”

현재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임소희(26)씨는 작업실 부근에 있는 출력소 앞에 쉴 새 없이 쌓이는 인화 용액통을 이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그동안 ‘날개’를 주요 테마로 삼아 작업을 하는 임씨는 용액통에도 날개를 달아주었다. 용액통을 3분의 2 정도 잘라 노출된 통으로 만든 뒤, 잘라낸 부분을 이용해 날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통 안에는 버려진 천으로 내피를 만들어 탈부착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 다른 작품은 통에 시계를 부착하고 내부에 조명을 설치해 용기의 재질을 그대로 살린 조명등을 만들었다. 날개 단 가방은 유아용 젖병이나 목욕 용품을 담는 가방으로 안성맞춤이고 간접 조명등은 분위기가 있는 방을 꾸미는 데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흔하디 흔하면서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들이 예술적으로 과거를 깨끗이 지우고 있었다.


△ 희망갤러리 전시작품

이래도 함부로 버리겠습니까

어쩌면 재활용 작품은 예술적 영감의 결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버리기 전에 다시 보면 예전에 미처 몰랐던 용도가 떠오를 수도 있다. 희망시장의 어머니로 불리는 김정은(61)씨가 내놓은 ‘맘대로 취급 앞치마’가 그런 작품이다. 가정을 가꾸는 지혜가 번뜩이는 재활용 앞치마의 재료는 냉동식품 같은 각종 선물세트의 포장 가방이다. 그런 가방은 화학섬유로 만든 육면체 모양이어서 장바구니로 쓰기에 불편하지만 앞치마로 변신하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물이 스며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크기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다. 유행이 지나 장롱 속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김성실씨처럼 옷을 찢어 대바늘로 뜬 뒤 재킷과 이브닝드레스로 바꿔 ‘화려한 외출’의 기회를 줘볼 만하다. 쓸모 있는 물건을 함부로 버린 그날 밤, 검은 기름방울을 의미하는 ‘오일리’(Oilly), 오염된 강에서 잠자는 ‘피시냐’(Fishnaa) 등 쓰레기 귀신의 공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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