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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오는디?” “범수하구 효섭이하구 한 세 명 오라구 할껴.” “안돼.” “왜? 왜 안되는디?” “오라구 하려면 다 오라구 해야지 누군 오라구 하구 누구는 오지 말라구 하면 공평하지 못하잖어….” “앗싸, 그럼 친구들 오라구 한다.” “너 분명히 아빠하구 약속했다. 만약에 너 하구 친한 놈들만 골라서 오라구 하면 혼날 줄 알어! 그리구 애들 다 오라고 한 거, 엄마한테 다시 물어봐야 한다. 아빠가 음식 준비하는 거 아니니께.” 큰 아이 인효 생일이었습니다. 반 아이들을 다 오라 했다는 말에 아내는 내심 걱정이었습니다. 때마침 토요일이라서 아이들이 점심을 먹고 오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고민 끝에 손자장면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아내의 손자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우리식구는 ‘촌놈들’답게 외식으로 보통 손자장면을 먹으러 가곤 했는데 3년 전부터는 손자장면 집에 더 이상 가질 않았습니다. 아내가 손님들로 바글거리는 그 ‘전통 손자장면’ 집의 비법을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아 냈냐구요? 장사 집이야 비법이 곧 돈줄인데 그걸 어디 쉽게 알려 주었겠습니까? 자장면 내용물을 젓가락으로 뒤적거려가며 곁눈질로 터득했지요. 어깨 너머도 아니고 그냥 눈여겨본 솜씨로 요리를 했는데 ‘전통 손자장면 집’ 그것보다도 맛이 있었습니다. 돼지고기, 감자, 양파, 양배추, 당근 등을 넣고 만든 소스에 밀가루를 반죽하여 직접 손으로 민 아내의 손자장면이 더 맛있습니다. 아내 자랑, 팔불출로서 말하는 게 아니라 입맛 까다로운 스님들조차도 감탄할 정도입니다(물론 스님들 자실 때는 돼지고기를 빼지요). 정오쯤에 인효 친구녀석들이 마당 가득, 말 그대로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3학년 전체 인원이 20명쯤 되는데 범수, 효섭이, 권주, 종필이를 비롯해 얼마 전 새로 전학 온 범태와 인효까지 남자아이들이 여섯 명이었고 그 틈에 연아, 유림이, 윤미 등 3명의 여자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보통 애들 생일잔치가 그렇듯이 피자 집이나 치킨 집에 전화 한통화로 해결하곤 하는데 아내는 우리 집 작은놈 인상이까지 합쳐 모두 열 명분의 손자장면을 뚝딱 해냈습니다. 워낙 먹성이 좋은 촌놈들이라서 그 귀하고도 흔한 손자장면에 불만을 토로하는 놈들은 단 한 명도 없어 보였습니다. 사실 녀석들은 노는데 정신이 팔려 불만을 가질 만한 짬도 없었습니다. 녀석들 입맛 돋구는데 나도 한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녀석들이 난생 처음 불어본다는 신기한 악기(?)를 하나씩 만들어 주었거든요. 내가 녀석들에게 만들어준 악기는 버들 피리였습니다. 물오른 버드나무 껍질을 통째로 벗겨 적당히 잘라 끝부분을 얇게 만들어 부는 버들피리. 아이들은 껍질이 싸~악 벗겨지는 것에 눈이 휘둥그래졌고 또한 나무 껍질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에 놀라워 했습니다.
조바심으로 기다리는 녀석들의 표정을 보면서 버들피리를 만드는 내 손도 덩달아 빨라졌습니다. 먼저 받은 녀석들은 익숙지 않은 버들피리 소리를 내려고 빽빽거렸습니다. 볼따귀가 아플 정도로 불어댔습니다. 한참을 불다보면 얼얼해지기 마련인 볼따귀를 만져가며 불어댔습니다. 불다가 망가졌다고 울상이 되어 다시 만들어 달라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동생에게 가져다 주겠다며 하나 더 만들어 달라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나는 나대로 신이 나서 부지런히 버들피리를 만들었습니다. 만들어 놓고 시범적으로 나 또한 빽빽거리며 버들피리를 불었습니다. “자 이쪽으로 모여라!” “삐이! 삐이!” “하나둘 셋!” "삐익 삐~엨" 사진 찍으면서도 불어댔습니다. 내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친구녀석 얼굴에 대고 빽 불어대고 여자아이들 귀에 대고 빽 불어놓고 도망치고, 소리를 잘 내지 못하는 녀석들은 볼 가득 헛 바람만 픽픽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공부 잘 하고 못하는 녀석이 따로 없었습니다. 말 잘하고 수줍은 녀석이 따로 없었습니다. 부자 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들이 따로 없었습니다. 애 어른 따로 없이 모두가 즐거웠습니다. 온 동네가 삐익! 삐익! 삐에엑! 삐에엑! 버들피리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버들피리를 빽빽 불다보면 금세 배가 고프게 됩니다. 그러니 고픈 배에 아내의 그 맛난 손자장면은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을 것이었습니다. 치킨이 없어도 피자와 콜라가 없어도 아이들은 투정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손자장면 하나로 충분히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정해진 놀이 따로 없이 앞 뒷마당을 우르르 몰려다니며 별 이유도 없이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녀석들은 지칠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저만치 앞산까지 올라 갔다왔습니다. 헌데 그 사이에 돌발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과자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있는 듯 없는 듯 말수가 적은 유림이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유림을 찾겠다고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거시기, 아까 둥구나무에서 여자 애 혼자 놀고 있던디….” 옆집 할머니 말씀에 아이들은 우르르 둥그나무로 몰려갔습니다. 둥그나무에서 혼자 놀고 있던 유림이는 아이들이 갑자기 떼거지로 몰려오자 집에 갈 시간인가 싶어서(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동구 밖으로 내달렸습니다. “한유림! 유림아! 거기서! 거기 서라니께!” 아이들은 유림이 이름을 부르며 뒤좇아 달려갔습니다. 아이들이 달려오자 유림이는 제일 먼저 가겠다고 더 빨리 죽어라 내달렸습니다. 뒤좇아가던 아이들이 뜀박질에 지쳐 설렁설렁 걸어가면 유림이 역시 뒤를 힐끔거리며 자신도 걸었습니다. “한유림~ 제발 거기 좀 서봐!” 아이들이 다시 뛰면 유림이는 추월당할까 싶어 배시시 웃으며 뒤 한번 힐끔 쳐다보고 막무가내로 뛰고 또 뛰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5백 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동구 밖 저 멀리 큰 도로까지 내달렸다고 합니다. 결국 큰 도로 앞에서 아이들은 유림이를 붙잡을 수 있었고 뒤좇아가던 아이들이 유림이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에이씨, 유림이 너 왜 자꾸만 도망치는 거여?” “집에 가려구.” “집에는 왜 가는 겨, 과자 파티 할려구 그러는데….” “으응? 집에 뭐 놓고 온 거 같아서….” 유림이가 친구들에게 미안하여 적당히 둘러댄 것이 ‘집에 뭐 놓고 왔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잘났건 못났건 어떤 남자아이들이건 잘 어울려 논다는 유림이. 다른 아이들이 누구누구와 서로 사귄다고 놀려대도 아무 생각 없이 배시시 웃기만 한다는 유림이. 우리 집 인효 녀석과 그 친구들은 어른이 되어 떠올릴 것입니다. ‘아, 내 어릴 적 착하고 어여쁜 유림이.’
그런 생각 속에서 내 마음조차 붕 뜨는 것만 같았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려왔습니다. 우리 집 큰 아이 인효가 내 어릴 적 그리운 친구 같았습니다. 유림이를 비롯한 인효 친구들이 가슴 아리도록 보고 싶은 내 어릴 적 친구들 같았습니다. 나는 그 날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버들피리를 맥없이 빽빽 불어보았습니다. 아이들과 어울려 버들피리 부는 것만큼이나 세상이 재미있고 즐거웠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들의 친구 녀석들 떠난 자리에 남겨진 버들피리 만지작거리다 눈 아리게 잡혀오는 옛 친구들 그리워 울컥 버들피리 불어 봅니다. 먼훗날 어른이 된 아들이 되어 아버지가 만들어 주었던 버들피리 불다가 이유 없이 동구 밖까지 내달리던 친구들 그리워 볼따귀 아프도록 빽빽 버들피리 불어 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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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9 오후 1:47 ⓒ 2004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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