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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들의 세대를 인정합니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1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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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들의 세대를 인정합니다
제 생애 최고의 생일 상을 받았습니다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임윤수(zzzohmy) 기자   
셋! 둘! 하나!

오늘(15일) 오후 6시를 알리는 시보와 동시에 아침부터 내내 기다렸던 각 당별 예상 당선자수가 TV에 발표되었습니다. 화면을 가득 메운 결과를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너무도 학수고대하던 결과였기에 울컥 서러움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초점이 흐릿해 지도록 눈가에 뜨끈한 뭔가가 맺혔습니다.

45번째 생일을 맞으며 나머지 인생을 '대통령 같은 국민으로 살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이젠 그렇게 살 수도 있을 거란 가능성이 오늘 제 생일 저녁상에 올려졌습니다. 수천 수만의 촛불과 값비싼 그 어떤 선물보다도 더 값진, 제 생애에 있어 전무후무할 그런 커다란 선물을 받은 듯합니다.

지난 주말 대전 시내에 있는 '도솔산'이란 곳엘 갔었습니다. 높지 않고 시내라 그런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이 많이 올라와 계셨습니다. 슬쩍 선거 이야길 꺼냈더니 소위 '노풍(老風)'이란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던 중 한 할아버지가 "요즘 애들한테 '옛날엔 먹을 게 없어 배를 곯았다' 이야기하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왜 굶었느냐'고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할아버지 세대는 우선 당장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기에 급급한 그런 배고픈 세대였을 겁니다. 허기진 배는 초근목피로 해결하고 타는 목마름은 맹물로 채우며 기근의 삶을 사신 분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먹고픈 것 아니 먹고 허리끈 졸라매며 배고픈 나라를 할아버지들이 먹고 살만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저는 보아서 압니다. 입고픈 것 아니 입으며 그 질기다는 삼베를 덕지덕지 덧대 기운 저고리가 다 해지도록 등짐을 졌던 세대, 하얀 쌀밥 대신 산나물 듬뿍 넣어 멀겋게 끓인 죽으로 끼니를 연명해야 했던 할아버지들 세대를 말입니다. 그렇게 배고픈 세대에서 벗어나려고 매달리다 보니 정신을 조여오던 위정자들의 술수를 느끼지 못하셨을 수도 있는 게 할아버지들의 세대일 수도 있습니다.

'먹고사는 게 최고의 가치였던 세대'에서 '정신적 자유와 삶의 질을 갈구하는 세대'로 견인한 세대가 할아버지들 세대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가치에서 혼돈이 생겨 할아버지들을 조금 혼란스럽게 하였거나 노엽게 할 수도 있었다는 걸 인정합니다.

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 '녹두서평'이란 책을 꺼냈습니다. 옆에서 거들어 주고 있던, 대학생이 된 딸에게 "옛날엔 감추거나 숨어서 읽던 책이다"라고 설명을 하였더니 아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금서였던 책이기에 83년 그때는 몰래 읽어야 했던 책이란 것을 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입니다.

손을 잠시 멈추고 금서와 금지곡 이야길 하였습니다. "아침이슬이란 노래는 물론 지금은 아무 곳에서나 마음껏 부를 수 있는 많은 가요들이 옛날엔 부를 수 없는 노래였다"고 하니 정말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책과 노래뿐이었습니까.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알록달록한 차들의 색깔도 전에는 거리에 존재할 수 없던 그런 시대도 있었다는 걸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 세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던 세대, 읽고 노래하는 것조차 억압당하던 그런 세대를 극복한 세대가 공존하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제 세대를 제 딸이 이해하지 못하듯 어른들 세대를 젊은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것도 속상한 일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런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소위 노인 폄하 발언에 아직도 불편한 심기가 남아있다면 오뉴월 봄눈 녹듯 마음에서 녹여주십시오. 그리고 이제 남은 여생은 배고프지도 않고 정신을 억압당하지도 않는 그런 시대를 살아보십시오. 설사 제 딸이 '비겁하게 숨어서 책을 읽었느냐' 비아냥거린다 해도 전 웃음으로 넘길 수 있을 듯 합니다.

생일 상을 놓고 마냥 '희희' 거리니 마누라가 한마디 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바라던 대통령 같은 국민으로 살게 되면 나는 영부인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거냐'고 말입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따를지 모르지만 대통령 같은 국민으로 살아 갈 수 있을 거란 기대와 희망을 가져봅니다.

제 45번째 생일 상을 희망으로 가득 채워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기 위해 구걸의 절이 아닌 감사의 절로 108배를 올리겠습니다. 일꾼을 자청한 후보들이 당선과 동시에 상전으로 군림하려 한다면 기꺼이 대통령 같은 국민으로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겠습니다.

전 지금 한없이 행복하고 내일 아침이 기다려집니다. 내일 아침엔 황금빛 햇살을 느낄 것 같습니다. 45번째 생일 상에 푸짐하게 마련된 이 행복감을 모두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아직 최종결과가 나온 건 아니지만 이대로의 결과만으로도 행복해 하렵니다.

2004/04/15 오후 11:04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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