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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정선 시절이야기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1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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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고기가 먹고 싶어요!”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정선 시절이야기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박철(pakchol) 기자   
아내와 결혼한 지 20년이 되었다. 20년을 오순도순 정답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 많이 싸웠다. 사소한 일이란 게 무엇인가? 일테면 나의 식성이나 아내의 식성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아내는 과일을 좋아하고 나는 생선이나 육류를 좋아한다. 아내는 수박, 딸기, 포도, 귤 등 과일이면 다 좋아한다. 그 중에 수박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다가도 “수박 먹어”하면 벌떡 일어나 작은 체구의 여자가 수박 한통을 다 먹는다. 수박뿐만 아니라 딸기나 포도도 엄청 좋아한다.

▲ 아딧줄을 필리핀으로 떠나보내는 날, 가족과 함께 돼지갈비를
ⓒ2004 느릿느릿 박철
지금은 경제적인 형편이 좋아져 가끔 과일을 사다 먹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그림에 떡에 불과했다. 나는 과일가게에서 과일을 사도 양을 많이 주는 쪽을 택하는 편이고, 아내는 양보다는 질을 더 선호한다. 나는 과일을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다. 주면 먹고 안 주면 말고 정도이다.

이상하게 어려서부터 단 음식은 싫었다. 유년시절 가난하게 살았지만 포도, 자두, 살구, 복숭아 등 이웃의 인심으로 맛은 보고 자랐다. 그러나 육류는 거의 구경하지 못했다. 그래서인가 나는 과일보다 육류를 더 좋아한다.

이것 때문에 아내와 가끔 다투기도 한다. 아내는 육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외출이라도 할 것 같으면 “포도 좀 사다 주세요… 딸기가 먹고 싶은데 딸기 좀 사다 주세요”하고 늘 과일 타령이다. 아이들 셋은, 나를 닮아서 과일보다는 육류를 좋아한다. 아이들이나 내가 “오늘 고기 사다 구워먹읍시다”하고 말하지 않으면 아내가 고기를 사오는 일은 거의 없다.

아내는 이불속에서도 과일 생각을 한다. 그만큼 과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아내에게 “그럼 과수원집 아들에게 시집을 갈 것이지, 가난한 목사에게 시집을 와서 만날 과일타령이야”하고 농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과일을 좋아하는 여자가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19년 전 정선에서 살 때였다. 신혼 초였다. 아내가 아기를 가졌는데 몸이 너무 약해 두 번 유산을 했다. 가난하고 작은 시골교회였지만 우리 부부는 행복했다. 교회에서 받는 생활비로는 두부 한 모 사먹을 여유가 없었다. 아내는 하루 종일 나물을 뜯으러 다녔고, 나는 산으로 고사리를 뜯으러 다녔다. 그때 아내가 뜯은 미나리를 몇 가마 분량은 먹었을 것이다.

가난한 것 말고는 생활에 아무런 불편이나 유감이 없었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여보, 고기가 먹고 싶어요!”하고 말을 하는 것 아닌가. 눈치 없이 과일이 먹고 싶다는 얘기는 가끔 했지만 “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처녀 적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를 먹어본 적이 있었나 보다. 칼질하는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는 말은 몇 번 들은 것 같다.

▲ 19년전 교회 주택 앞에서. 산에 잔설이 남아 있다.
ⓒ2004 느릿느릿 박철
그러나 그 흔한 돼지고기 한 근 사다 먹을 돈이 없었다. 나는 건성으로 들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교인 아주머니 한 분이 교회 주택으로 찾아왔다.
“전도사님요, 잠깐 나와 보시래요.”

갑자기 웬 일인가해서 나가 보았더니 제우 엄마라는 분이 신문지로 둘둘 말은 덩어리를 내보이면서 “전도사님요, 이거 돼지고기래요. 잡숴보실래요? ○○집 돼지가 병이 나서 죽은 걸 땅에 묻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아깝다고 다시 캐서 몇 집이 나눴어요. 잡수시려면 잡수시고 못 잡수시겠거든 그냥 버리세요.”

그 말을 하고 신문지로 둘둘 말은 돼지고기 뭉치를 건네주곤 가버리셨다. 속으로 기분이 무척 상했다. ‘병들어 죽은 돼지를, 그것도 땅에 파묻은 걸 다시 캐서, 먹고 잘못되면 어떡하라고 갖고 왔단 말인가?’ 속으로 부아가 났지만 어쩔 것인가? 모두 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고, 그들에게는 죽은 돼지가 조금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아내가 날보고 “이거 어떻게 할까요?” 하길래 “그냥 밖에 내다버려요”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이내 제우 엄마가 돼지고기를 갖고 온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부뚜막에 앉아서 저 혼자 무얼 맛있게 먹고 있는 게 아닌가. 갈비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니, 그거 어디서 난 거야?”하고 물었더니 아내는 빙긋 웃으면서 “당신도 먹어 볼래요?”한다.

나는 집히는 데가 있어서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이냐?”고 다그쳤더니 며칠 전 제우엄마가 갖다 준 돼지고기란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내는 비위가 좋은 여자가 아니다. 내가 화가 나서 “그걸 어떻게 먹어?” 했더니 “괜찮아. 맛있어! 당신도 좀 먹어 볼래요.”한다.

화가 났지만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아내는 며칠동안 제우엄마가 갖다 준 고기를 다 먹었다. 물론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지금껏 아내로부터 ‘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은 한번도 듣지 못했다.

▲ 19년전 덕송교회 교우들과 함께. 교회 앞에서.
ⓒ2004 느릿느릿 박철
참으로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돼지고기를 삶아먹어서였는가? 아내의 건강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몸무게가 40kg 안 나가던 여자가 살이 포동포동 찌기 시작했고, 우리집 큰 아들 아딧줄을 임신하게 되었다.

오늘 저녁, 돼지고기를 구워먹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그 때 일이 갑자기 환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일은 고기 대신 아내가 좋아하는 딸기라도 사다주어야 하겠다.
박철 기자는 강화 교동섬에서 사는 목사이며 시인이다. 지은 책으로는 <어느 자유인의 고백>(신어림)과 최근 출간한 산문집 <시골목사의 느릿느릿이야기>(나무생각)등이 있다. 현재 <느릿느릿 이야기>(http://slowslow.org)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며, ‘느릿느릿’의 취지에 공감한 사람들과 함께 이 길을 가고 있다.

2004/04/17 오전 9:51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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