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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는 전쟁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2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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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는 전쟁

“2차대전 당시 일본과 미국이 남방 지역에서 싸울 때 양쪽 사망자 비율이 10 대 1이었다. 유황도에서 오키나와로 전장이 이동하면서 그 비율은 2 대 1이 됐고, 일본 본토 상륙전 무렵에는 미군의 인적 피해는 더 늘어났다. 이 때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외교관 출신의 한 일본인 학자가 얼마 전에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장이 한 얘기라며 인용한 구절이다. 나이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또는 옳은지 그른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이 학자는 거기에다 다음과 같은 얘기를 덧붙였다. “지금 (유혈분쟁 중인)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의 (사망자) 비율은 2.5 대 1 정도로, 이스라엘인은 위기감을 갖고 있고 군사행동을 더욱 격화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분쟁이 빈발하더니 마침내 이스라엘 쪽이 팔레스타인 무장저항 단체 하마스의 지도자 셰이크 아메드 야신과 압둘 아지즈 란티시를 연이어 ‘표적살해’하는 것을 보니 그 얘기가 떠올랐다.

 

‘99 : 1050’은 4월 들어 18일까지만 이라크에서 미군 99명이 숨지고 이라크인은 1050명 이상이 숨졌다는 얘기다. 대체로 10 대 1 정도의 비율이어서 조지프 나이의 계산법대로라면 미국으로선 아직 그다지 우려할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전투기를 몰고 항모 에이브러햄 링컨 함상에 위풍당당하게 내려 서서 사실상 전쟁 승리를 선언한 것이 지난해 5월1일이었다. 그러나 석달쯤 지난 8월에 미군 사망자가 침공 당시의 미군 사망자 수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그런 추세는 계속됐다. 1050명이란 수치는 주로 이달 초부터 시작된 바그다드 서쪽 수니파 이슬람 거점도시 팔루자에 대한 미군의 무차별 공격과 관련이 있다.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쏜다’고 했던 팔루자 학살 희생자들 다수는 부녀자와 노약자들이라고 목격자들은 전하고 있다. 지금 팔루자 주민 8만명 이상이 그 지옥의 현장에서 빠져나와 바그다드 등지에서 피난민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팔루자 학살 희생자들을 뺀 그 직전까지의 미군과 이라크인 사망 비율은 조지프 나이가 원자폭탄, 요즘식으로 바꿔 말하면 대량살상무기(WMD) 사용을 정당화한 그 임계치에 도달해 있었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미군은 그때 이미 더는 감내하기 어려운 비율(임계치)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었고, 국면 전환을 위한 대규모 공세가 불가피했으며, 사설 경비업체 미국인 직원 4명의 주검훼손 사건은 다만 그 신호탄이자 구실이 됐을 뿐이라는 추론이다.

 

지난 13일 기자회견장에 나온 부시 대통령이 말한 ‘결정적인 힘’의 사용도 그런 사정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날 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은 미군의 이라크 점령은 ‘자유와 해방’을 위한 것이고, 외국군의 점령에 저항하는 이라크인들은 극소수의 ‘범죄자들, 문명의 적들, 테러 살인마들’이라고 강변했다. 전도된 ‘제국주의 어법’의 전형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결정적인 힘’의 사용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계속 대항하면 할수록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며, 그것은 역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위력으로 상대에게 되풀이 각인시킴으로써 저항의지를 꺾어버리겠다는 것이다.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정권이 야신에 이어 란티시마저 죽이고 야세르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마저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나 팔루자 학살은 그런 범주 안에 든다.

 

지난주 바그다드에 간 기자들은 대다수 주민들의 생활이 몇 달 전보다 나아진 게 별로 없다고 전했다. 전기·수도 사정이 그랬고, 고용사정과 치안은 더 나빠졌다. 재건사업은 사실상 중단상태다. 또다른 관찰자들은, 과도통치위원회에 정작 재건에 유능한 테크노크라트들은 소외당하고 친미적인 정치꾼들만 득실거리며, 정보도 통치능력도 의심스러운 미군은 점령유지를 위한 권력장악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정적인 힘’도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일 수밖에 없다.

 

한승동 국제부 부장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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