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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가가 싫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22.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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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가가 싫다

겸/ 10대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학교, 가족, 이성애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을 때, 나는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권리로부터 멀어졌으며 더 이상 국가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는 단지 학생증이 없어 청소년 교통카드를 만들지 못하고, 병역 미필자가 국외 여행을 위해 자질구레한 서류들을 준비해야 하는 불편함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신용불량자가 몇백만인 남한은 더 이상 ‘신용’할 수 없는 곳이고, 평등하지도 창조적이지도 독창적이지도 못하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국민에게 희망을 제공할 능력도 없는 공허한 이름이다. 또한 국가는 약자의 피와 살을 뜯어먹으며 합법이란 명목으로 부조리한 현실을 정당화하고 보편화한다. ‘국가의 유일한 정의인 헌법은 국가의 실체를 은폐하는 국가의 그림자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2000년 국내 최초의 게이 사이트인 ‘엑스존’은 법에 저촉돼 음란물로 등록되었고, 3년간의 싸움에 걸쳐 올해 2월 패소 판결을 받았다. 인권단체들과 성적 소수자들이 참여한 엑스존 후원의 밤에서 내가 떠올린 사람들은 불특정 다수의 동성애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난해 이맘때쯤 자살한 청소년 동성애자였고, 분신이 끊이지 않았던, 지난해 생계를 보장받지 못하고 무참히 죽어간 노동자와 농민들이었고, 여성이자 중증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이혼을 당하고 양육권을 빼앗긴 어머니로서 국민기초생활법 보장을 요구했던 최옥란 열사였다. 심지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불길 속에 사라진 전태일 열사가 떠오르기까지 했다. 그들은 헌법에 명시된 시민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지만, 시민의 권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약자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시민을 탄생시킨 부르주아 혁명 때부터 국가가 이어온 ‘전통’이다.

탄핵을 둘러싼 풍경도 여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정부는 탄핵반대 집회가 집시법을 어긴 불법 집회라며 꼬투리를 잡았다. 그들은 지금 법적 절차를 따라 탄핵소추의 위헌 여부를 따지자고 한다. 그러니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 잠자코 이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으란 말이다. 실제로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란 그런 것이다.

탄핵반대 집회에 시비거는 모습은 그래도 봐줄 만했다. 사실 나는 촛불시위의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탄핵 사태 이후 넘쳐나는 ‘정치의 과잉’이 소수자의 목소리를 깡그리 지우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아니나 다를까 촛불시위 바로 옆에서 국가는 또 일을 벌였다. 3월26일 최옥란 열사의 2주기 추모제 때 경찰은 이를 불법 집회라고 단정내렸다. 그들은 평화적 문화제를 가차 없이 짓밟았다. 바로 그 옆의 현장에는 탄핵반대 촛불집회가 경찰의 ‘보호’ 아래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추모제에 참석한 한 장애인의 말처럼 촛불이 없어서 차별 철폐를 외친 그들을 연행한 것일까. 도대체 국가의 그림자는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의 삶을 집어삼켜야 만족할까. 나는 과연 국가를 긍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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