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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브러더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22.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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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브러더

겸/ 10대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책이나 인터넷 이전에 비디오를 통해 세상을 배운 난 비디오방 아르바이트에 대한 환상이 있다. 일 틈틈이 진열된 각종 비디오를 마음껏 볼 수 있으리라는 나의 환상은 “비디오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평생 볼 비디오는 다 봤다”라던 친구의 말로 더욱 확고해졌다. 거기에 ‘잡탕’ 영화의 대가인 쿠엔틴 타란티노의 비디오가게 점원 경력은 나의 환상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얼마 전 겨우 얻은 DVD방 아르바이트는 비록 비디오는 아니나, 기대가 컸다.


△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지금까지 다섯번의 아르바이트를 한 내게는 징크스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고용인과 항상 불편하게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단순한 징크스라기보다 권력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반복들은 누군가와 일하는 것을 굉장히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몇년간 꿈꿨던 환상을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 아르바이트 징크스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고용인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하기로 했다.

처음 출근한 날 주인은 지난 아르바이트생들을 씹으며 ‘너는 그러지 말라’는 무언의 위협을 가했다. 그는 ‘로봇’이라는 신조어를 개발했는데, 시키는 일만 하고 적극적으로 일하지 않는 직원을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난 ‘로봇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여러 부류의 아르바이트생을 거론하다 금방 그만두는 부류 차례가 오자 뜬금없이 나를 신뢰할 때까지 식사 제공은 하지 않겠단다. 11시간 이상 일하는 내게 식사 제공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도대체 뭘까. 처음 나를 고용할 때의 조건을 간단히 번복하는 재기에 가까운 뻔뻔스러움. 그가 밥 먹는 모습을 옆에서 뻘쭘히 쳐다보던 나.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한다. ‘이번만은 참아야지’와 ‘단 1할의 진심도 이 사람에게 노출하지 않으리라. 고용인과의 관계는 기계(로봇)적이어야 해’. 그가 즐겨보는 영화(?)는 오직 포르노라고 한다. 미국 포르노 스타를 예찬하는 그의 말을 경청하는 척하며 ‘그럼 왜 DVD방을 운영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 아마 이곳과의 인연도 결코 좋지 못할 것이란 예감이 번득였다.

“잔고에 한치의 오차가 있을 경우 너의 급여에서 모두 제한다”라는 말과 함께 고용주 퇴근. 이제야 좀 편안하게 앉을 수 있을까 할쯤, 잔소리와 푸념을 늘어놓던 고용인을 대신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비디오방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였다. 이건 보통 카메라가 아니라 원격 조종이 가능해 그가 집에 가서도 나를 감시하고 메신저를 통해 명령을 내리도록 프로그래밍돼 있었다. 오호, 통재로고. 내 행동 하나하나가 영상으로 전송돼 감시할 수 있는 첨단 과학기술은 언짢음을 넘어 섬뜩했다. 마치 오웰이 예감한 빅브라더의 시대를 마주한 듯한 섬뜩함.

그런데 도대체 비디오방에 대한 환상의 자취는 어디 가고 왜 이런 푸념이나 늘어놓게 된 건지, 왠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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